겨울동자의 넋이 환생한 여름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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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 정원에는 능소화, 원추리, 참나리, 범부채, 물레나물, 고추나물, 망종화, 달맞이꽃, 금잔화, 백양꽃, 피나물 같은 노랑~주홍 꽃들이 많이 피어난다.

우주생성의 근본이 되는 다섯 가지 색 가운데 봄은 청색, 여름은 붉은 색, 가을은 흰색, 겨울은 검정색이고 중앙은 노랑색이다. 이 오방색 가운데 적과 황은‘광명’의 열과 빛을 상징하여 여름의 기운이다. 동자꽃도 주황색을 피우는 여러해살이 여름꽃이다.

우리나라에는 동자꽃 외에 털동자꽃, 가는동자꽃, 제비동자꽃 등이 자라는데 꽃모양으로 구분하면 동자꽃은 끝이 오목한 하트모양의 낱잎이 동그랗게 배열한 꽃이라면 털동자꽃은 오목한 부분이 더 깊이 파여서 ‘Y'자 형에 가깝다.

가는동자꽃은 같은 석죽과의 패랭이처럼 날카롭게 여러 번 갈라지는데 제비동자꽃은 가는동자꽃 보다 더 깊게 갈라져 제비의 꽁지깃처럼 날렵해진다. 한자 이름이 전라화(剪羅花, 비단가위꽃)인 것과 유사한데, 잎이 아니면 동자꽃의 꽃들은 한집안 식구라기엔 서로 너무 안 닮았다.

『동자꽃』의 속명 리크니스(Lychnis)는 ‘붓꽃’을 뜻하는 희랍어 리크노스(Lychnos)에서 온 말이며, 종소명 코그나타(cognata)는 ‘친근한’이라는 뜻이다.

▲제비동자꽃

2013년 국립수목원은 희귀·특산식물 자생지 조사를 수행하던 중 문헌기록만 있었을 뿐 국내 분포가 불명확했던 가는동자꽃의 자생지를 발견해 모니터링을 실시함으로써 동안 이견이 있어왔던 자생지 정보를 확보하고 종자의 저장과 증식에 성공했다고 한다.

“먼 옛날 강원도 어느 골 깊은 암자에 스님 한 분과 다섯 살 난 동자가 살고 있었더란다.

한 해가 저물고 산중의 겨울채비를 서둘러야 할 즈음, 스님은 어린 동자를 남겨두고 마을로 내려갔다지. 그런데 별안간 엄청 많은 눈이 내렸던 거야. 마을과 암자 사이에 길이 끊기고 애타게 스님을 기다리던 어린 동자는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죽고 말았지. 이듬해 여름, 동자가 묻혔던 무덤가에서 달덩이로 도리반거리는 꽃이 피어났어. 그러더니 하나 둘 스님이 내려갔던 그 마을길을 향하는 거라. 사람들은 필시 동자의 넋이 환생한 것이라 여겨 슬퍼하다가 그때부터 이 꽃을‘동자꽃’이라 불러주게 되었다는 거야...”

설화의 상상이 무덤가의 새나 꽃으로 환생하는 슬픈 사연의 주인공들로 흔하지만 동자꽃에 빗댄 어린 동자승의 이미지가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이야기도 많지 않은 것 같다.

동자꽃은 산사 근처의 높이에서 서식하는 산꽃이라는 점, 꽃봉오리가 동글동글하여 동자의 귀여운 얼굴에 부합하며, 다섯 살 나이와 다섯 장의 꽃잎, 그리고 그 한 장 한 장을 떨구며 스님을 기다렸을 저 심장기호(♥)의 꽃잎들, 승려들이 두르는 가사(袈裟)의 주황색까지. 여기다 필자가 짓궂고 공교로운 질문 하나를 덧대자면 ‘동자꽃의 달고 찬 성미의 약성’이다. 겨울 추위에 죽은 동자의 넋이 꽃몸으로 돌아와 금생에 여름감기로 상한 이들의 열꽃을 다스려준다? 저 착하디착한 몸 보시의 아이러니까지!

▲동자꽃
동자꽃 전설은 한여름에 피는 꽃인데 한겨울의 ‘기다림(꽃말)’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계절을 건너뛰는 이야기의 정점에서 역시 동자꽃 만의 미감과 식생이 빛난다. 숲은 여름을 향해 아청빛으로 깊어 가는데 꽃은 ‘홍일점’으로 저마다 붉으니 사람들이 어찌 스치며 본체만체할 수 있을까.

또 마을을 향해 옷깃을 펄럭이면서 이제나저제나 스님 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자의 상기된 표정이 어찌 보이지 않을까.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발을 구르는 노승의 타는 심장도 매마찬가지. 사람들의 감상 속에 사연이 먼저였을지 꽃이 먼저였을지 알 수 없으되 동자꽃은 덕분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옛이야기에 딱 부러지는 어여쁜 이름 하나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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