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조성환

인문학 열풍이 일고 있다.

그 이유는 개인의 주관이 중시된 다양화된 사회 속에서 나의 뚜렷한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데 인문학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편지’는 인문학의 중요성이 구절구절마다 피부로 와 닿게 한 책이었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정약용 선생의 박학다식함과 세심함 그리고 효(孝)와 제(弟)정신에 의한 사회행복 사상 등이 나타났고 유배생활 중에 폐족이라는 주위의 질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과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자식들에 대한 끊임없는 독려 등이 무척이나 감동을 줬다.

책 속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식들에 대한 훈계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많았는데 독서하는 방법에서 정약용 선생은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내리기만 한다면 하루에 백번 천번을 읽어도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고 했다.

또한 무릇 독서하는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그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수 백 가지의 책을 함께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해 깊이있는 독서를 강조했다.

사실, 지금의 학문이 법학이니 심리학이니 경제학이니..등등 여러 가지 분야로 나뉘어져 있지만 깊이 들어가면 한 곳에서 뻗어나왔고 또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 선생은 이러한 이치를 이미 궤뚷고 있다는 감을 받았다.

특히, 이 글귀는 정약용 선생께서 통독을 통해서 다독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준 대목이지 않나 생각된다.

지금의 사회가 다양한 주장이 혼재돼 있는 복잡다난한 사회로 지적되고 있는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내 자신이 그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에 대한 ‘기준점’을 잡는 것인데, 정약용 선생은 이러한 기준점들을 제시해 주었다.

가령“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그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던지 “마음 속으로 남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저절로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화평스러워져 하늘을 원망하는 그런 병통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고 “ 학문을 하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 빛을 올바르게 하는 것” 3가지로 잡고 이 세 가지도 못하면서 다른 일에 힘쓴다면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고 재주가 있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할지라도 결국은 발꿈치를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게되어 어긋난 말씨, 잘못된 행동, 도적질, 대악, 이단이나 잡술 등으로 흘러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또 정약용 선생은 “끝을 보면 그 근본을 헤아릴 수 있고 흐르는 물을 건너다보면 수원지를 찾아 낼 수 있다”라며 거짓말을 경계했고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 것이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며 비밀히 하는 일이 없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는 정약용선생의 생전의 시대에서 500여년이 지난 지금의 과학의 시대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초스피드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가슴깊이 새겨야 할 교훈으로 받아 들여졌다. 특히, 정약용 선생의 천하에 두가지 큰 기준에 관한 얘기는 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체계적이도록 했다.

정약용 선생이 말한 두가지 큰 기준 중 하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인데, 이 두 큰 기준에서 네가지 등급이 나온다는 것이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로움을 얻는 단계가 두 번째 단계,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는 단계가 세 번째 단계고요, 마지막으로 그름을 추종하고도 해로움으로 얻는 단계가 가장 낮은 단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많은 일을 해 가며 살고 있지만 그 많은 일들이 이 네가지 단계 중 어느 하나에 포함된다는 것에 실로 놀랍기도 했고,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그 문제를 풀기위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 결단을 내리기 위한 판단형성에 도움을 주는 글귀였다.

하지만 정약용 선생의 글에서 아직도 내 자신이 혼돈스러웠던 부분은 다산이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중에 맹자는 대체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지만 소체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어 금수에 가까워진다 하였으니, 만약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만 뜻을 두고서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려고 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이름은 벌써 없어지는 자가 될 것이니 이는 금수 일 뿐이다.

금수와 같은 데도 원할 것인가라고 되물으셨는데..??

요즘의 세태가 삶을 묵묵히 한계단 한계단…, 계단 오르듯이 사는 것보다는 고생안하고 편하게 사는데 급급한 지가 오래된 일이라서 다산의 이같은 말에 요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기만 했다.

이 대목에서 나 자신도 인지부적응 상태를 맞기도 했다.

이는 나 자신도 요즘 세태에 물들여 있다는 말도 되겠다. 아무쪼록 이번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뿌리없이 떠도는 물위의 부초 같은 삶에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묄씨와 같은 흔들림 없는 기준을 얻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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