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연작 …김종 시인의 안성현 탐구 ‘영감과 열정, 그리고 자유예술혼의 시간’

▲김종
여기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우선 “부용산 오리길에”에서 인용한 ‘부용산’은 ‘20년도 훨씬 전에’ 박성룡 시인이 불렀다는데 ‘작사, 작곡자는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를 어림하면 1970년대 중반쯤이 아니었을까.

박성룡 시인은 1932년 해남 태생으로 1955년에 문학예술로 등단한 시인이며 사상계에 근무한 인텔리 지성인이었다. 이 같은 박성룡 시인이 ‘부용산’의 작사, 작곡자를 몰랐다면 ‘부용산’이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비밀리에 불렸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인용된 ‘정설 부용산’에는 박기동 누이의 죽음부터 안성현과의 만남과 김정희 학생이 목포에 온 사연, 조희관 교장의 교육자로써의 면모, 안성현이 이 곡을 작곡할 때의 에피소드, 그리고 빨치산이 ‘부용산’을 불렀다는 사실까지가 담겨있다.

김성우는 「부용산」이 1절밖에 없어 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호주에 거주하는 박기동 시인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2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947년 1절이 나온 지 52년 만인 1998년에 2절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안치환이 구전되던 노래를 채록해서 1절만을 두 번 반복하는 형태로 부른지 1년 뒤인 1999년에 이동원이 「부용산」을 부른 것이다. 이때는 악보가 확보되었고 2절이 추가되었고 작사 박기동, 작곡 안성현도 선명하게 표기되었다.

*2절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곳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000년 5월 29일에는 목포에서 배우 김성옥에 의해 ‘목포 부용산 음악제’가 열렸다. 실재한 부용산은 벌교이므로 부용산에다 접두어로 ‘목포’를 올린 명칭이다. 이 자리에서 소프라노 송광선이 2절을 더한 「부용산」을 노래했다. 1948년 4월에 목포에서 배금순이 처음으로 부른 후 53년 만에 2절을 얹어서 목포의 공식적인 무대에 다시 오른 것이다.

「부용산」은 이처럼 노래의 주인공만큼이나 기구한 사연을 안은 우여곡절의 노래인 것이다.

‘목포 부용산 음악제’보다 1년 앞선 1999년 10월 1일에 보성군 벌교읍 부용산 오리길에는 「부용산」 시비가 세워졌고 2002년 4월에는 항도여중의 후신인 목포여고에 「부용산」 노래비가 세워졌다.

2009년 4월 30일에는 ‘남평읍민의 날’에 지석강변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세워졌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안성현을 기리고 복원하는 일이 하나하나 채워지다 보면 안성현의 인간과 예술은 거대한 숲으로 우거질 것이다.

2008년 초에 안성현선생의 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최정웅)가 결성되고 건립의 일이 진행되었는데 이 나라 민족시인 김소월의 창작시 ‘엄마야…’에다 68년 전에 곡을 붙여서 세인들의 운율로 회자되었다는 점에서 사실 이상의 감동을 주었다. 인터넷 통계에는 소월의‘엄마야…’를 작곡한 저작권자는 24명에 이를 만큼 안성현 이후 이 시에 곡을 붙이는 일에 여러 작곡가들이 앞 다투어 참여했던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3박자의 동요풍의 「엄마야, 누나야」는 KBS와 TBC의 악단장을 역임한 김광수 씨가 그 곡의 작곡자이다. 김광수 씨는 MBC 초기 악단장을 지낸 김광빈의 형이며 가수 배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우선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는 4박자로 곡이 장엄하여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안성현의 이 곡이 널리 애창되었던 것 같다. 남도일보 김선기 기자의 [2008. 3. 24]일자의 글을 보면 1961년생인 김기자 본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1960년대 중ㆍ후반쯤에 당시 22살이던 작은어머니에게서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를 배웠다는 것이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를 선생님께 다시 배웠다고 회상한다.

안성현은 이데올로기에 묶인 채 부자유의 수면 아래로 사라진 채 전설 속의 인물이 되고 김광수는 방송국에 근무한데다 이미자, 정훈희 등 유명가수들에 의해 그의 「엄마야, 누나야」가 취입되는 한편 여러 행사장이나 방송매체의 전파를 타고 불리면서 어느새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는 사라지거나 묻히고 김광수의 ‘엄마야 누나야’만 일방적으로 날개 치며 보급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서 국민 애창곡으로 불리는 김광수의 “엄마야 누나야”가 최초의 작곡인 안성현의 노래에 비해 어느 만큼의 독창성이 있는 것일까. 식견이 좁아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할 순 없지만 두 곡은 분명 짚어가며 분석하면 비교해볼만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안성현은 그 동안 ‘월북음악가’라는 붉은 딱지가 붙어 아예 지하로 숨어버린 처지가 되었고 지금 불리는 “엄마야 누나야”는 방송과 인기가수까지를 앞세워 국민애창곡으로 욱일승천의 길을 거듭하였다. 한쪽은 닫혀있고 다른 한쪽은 만국기처럼 게양하여 휘날린 형국이었으니 결과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엄마야…’는 작곡가 안성현에게 음악적 재능과 감성을 부여한 고향땅 남평 드들강변 모래밭이 이 작품의 창작적 영감으로 작용하였을 개연성probability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고향 그리는 심성은 한결 커지는 것이다.

이 노래는 1948년 발간된 안성현 제1작곡집의 한 곡목이었고 이외에도 ‘부용산’(박기동 시) 등 10편의 작품이 작곡가의 고향 그리는 정감에다 슬픔과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가 희망의 시간으로 환치되어 있다.

이들 중 ‘부용산’이 지닌 음악적 호소력은 이 노래의 특별한 사연에 접하지 않고도 애수에 젖고 절절한 비감에 물결쳐 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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