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
시인이든 작곡가든 자신의 창작의도와 무관한 것은 당자들의 인생과도 별개이다. 또한 작품은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전적으로 독자의 소유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인 민족 비극의 문제가 엄존한 나라에서 시인이든 작곡자든 사상의 올가미를 들이대는 것은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다.

사상에 붉은 점이 찍히면 그 자체로 치명적이던 시대에 개인적이고 불확실한 문제를 정확한 확인 없이 자의적인 잣대만으로 좌경이니 월북이니를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안성현을 써낸 그간의 문장들에서 기정사실화한 ‘월북’문제를 포함하여 몇 가지 관심사를 살피기 위해 김재민(1924~, 당시 86세, 지금은 93세. 원로음악인) 선생을 두 차례-(2008년, 6, 14)과 (8, 6)-에 걸쳐 면담하였다.

선생은 노령임에도 “안성현에 대해서는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마지막 모습을 증언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으로 안성현 선생의 생애를 복원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하나라도 더 말해 주겠다는 자상함까지 보이셨다.

△ 안성현 선생과는 처음 언제 어떻게 만나셨는지?

1950년 5월이면 6.25직전이고 안성현 선생이 목포사회에서 교직을 떠나 서울 등지에 있을 때였다. 그때 목포여중 강당에서 이 학교 음악교사 이득주의 피아노반주로 안성현 독창 발표회를 가졌었다.

안성현과는 그때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날의 무대에서 안성현은 〈엄마야…〉는 부르지 않았지만 〈부용산〉, 〈진달래〉, 〈내 고향〉등 노래가 이어질 때 성량이나 가창력이 대단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목포 학생이나 시민들 사이에는 〈부용산〉을 애창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 안성현 선생에 대해 기억하시는 일들은?

안성현 선생은 1950년 5월 선생의 독창회 때 처음 만나고 그 후 몇 차례 더 만났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이 목포에 들어온 것은 광주보다 하루 늦은 7월 24일이었다.

목포에 진주한 인민군이 목포시내 음악교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려서 간 자리에서 안성현 선생을 만났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인민군은 계속 문인, 음악가 등등 예술인들을 부르고 목적에 맞게 배치해 지시를 내렸다. 음악인들에게는 이 공장 저 공장에 오르간을 짊어지고 찾아가서 악보에 맞춰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라고 하였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우리들 세상이다 활개 치는 판’이어서 노래를 가르치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못했다.
인민군들은 모든 우선순위를 투쟁경력에 두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투쟁실적이 없기는 나도 안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목포에서 피아노상을 경영하는 사람이 음악동맹위원장이었는데 안성현은 그 자보다 음악 실력은 월등했지만 투쟁경력이 없어서 멸시 당하는 것을 보았다.

△안성현 선생을 마지막 보신 날은?

현재 한국에서 안성현 선생의 목포에서의 생활이나 입북할 때까지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증언할 사람은 내 자신뿐이라고 확신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이틀 전인 9월 15일 최승희의 딸 안성희安聖姬가 평양에서 내려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동행하던 친구가 안성희 무용발표회의 리셉션에 함께 가자고 했다.

무용도 안 봤는데 참석하기가 좀 뭐하지 않느냐니까 그래도 본 셈치고 참석하자고 해서 시간에 맞춰 가게 되었다.

강당에는 학생용 걸상으로 행사장이 차려졌고 장내에는 여기저기 촛불이 켜져 있었다.
무심코 앉은 것이 주인공 안성희의 옆자리였는데 조금 떨어져서 안성현의 모습도 보였다.

내심 좋은 자리에 앉았다는 생각과 안성희가 북에서 유복하게 지낸다는 인상을 받았다.

… 발표회와 리셉션을 마친 장내에 촛불이 꺼졌다. 깜깜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도 현관으로 나가다말고 대기하고 있던 소련제 찦차 앞의 안성현을 만났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까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해서 그럴까 한다”고 하였다. 나는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성현을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으니까 미군들이 서울로 들어갔다면 평양 길이 끊어졌을 텐데 안성현은 어찌 됐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안성희가 평양에 있다는 풍문이 들려서 안성현도 무사히 평양에 도착했겠구나 생각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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