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
△안성현 선생에게 좌경음악인, 월북 등의 표현을 쓰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아주 많이 틀린 말이다.

그는 순수 로맨티스트에 음악 실력이 대단히 높은 분이었다. 당시는 4년제 음악대학이 없었고 서울음대 전신인 서울음악전문학교 밖에 없던 때로 안성현의 작곡집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음악수준으로 대학 교수가 되기에도 충분하다.

안성현은 그만큼 제대로 갖추어진 음악가였다.

그리고 안성현이 평양에 가던 9월 15일만해도 ‘월북’이나 ‘월남’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때는 부산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민군치하인데 목포에서 평양을 방문하거나 다녀온다는 말은 될지 몰라도 남과 북이 서로 분단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 북으로 간다”거나 “삼팔선 또는 휴전선의 북쪽으로 넘어 간다”는 의미의 ‘월북’은 용어 자체가 없었을 때이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돌변하면서 안성현 선생이 평양 가겠다고 나선 이틀 후인 9월 17일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본격화되었고 예측불허의 국면이 전개된 것이다.

이리 본다면 안성현의 평양방문 시점은 대단히 불운했다고 할 수 있고 북한에서 하루하루를 기다리며 상황이 트이기만을 기다리다가 불가피하게 고착된 상황에 붙들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묶인 이 같은 상황은 ‘억북’이라는 말이 어떨까한다.

△이밖에 하시고 싶은 말씀은?

안성현은 대단한 음악가였다. 지금 보니까 안성현이 1920년생이라면 그가 평양 가겠다고 나선 것이 1950년이었으니까 남한에서 30년을 살아온 셈인데 그의 음악적 성과는 정말 놀랄 만큼 대단했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에다.

한 작품 한 작품이 한국 음악을 앞서서 이끌 만큼 수준도 높고 선구적이다.

평상시에 그를 만났을 때 사상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인민군 진주 때 투쟁실적이 없다하여 음악동맹위원장에게 멸시당한 일, 가족을 남에 놔두고 음악회 일로 평양 다녀오겠다며 북으로 간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평양행을 ‘월북’으로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나주가 낳은 천재 작곡가 안성현 선생은 그간은 남북으로 나뉜 반쪽짜리여서 이를 펼쳐서 완전한 하나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이 필요했었다.

어찌 보면 안성현 선생은 남한에서의 그 반쪽마저도 묻어두거나 덮어두고 극히 쉬쉬하며 지낸 제한적인 금단의 세월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편향된 이데올로기와 정치논리에 기인한 불행한 일이었다. 예술가에게 이데올로기는 순수예술을 멍들게 하는 맹독성 질환이거나 악성 종양일 뿐이다.

그런 터에 예술가에게 선택적 이데올로기를 머리에 올리는 일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모른다. 실제로 안성현 선생 본인에게도 86년의 생애 중 30년은 남한에서 56년은 북한에서 살아내는 동안 한 인간으로써 이데올로기로 인한 어느 만큼의 조바심과 노심초사가 뒤따랐을까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 자리는 안성현 선생의 예술에 나아가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그의 생애를 살피는 자리였다. 예술가를 살피고 평가하는 일은 그 하나로 레온 에델의 언명처럼 “그 나무에 그 열매”를 대입하면 안성현이라는 나무가 제대로 복원되지 않고서는 안성현이 숙성시킨 열매들을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감나무에 감이 열리는 것처럼 안성현이란 나무에는 안성현이라는 열매가 열리는 게 당연한 이치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성현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그의 나무에서 열린예술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형편이야 마찬가지겠지만 선생이 살았던 남쪽의 30년만큼 북쪽에서의 56년의 세월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질곡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안성현이라는 자유예술혼이 번갈아 두 나라에서 겪었을 수많은 우여곡절은 뒤에 남은 우리에게 다다를 수 없는 연민과 그리움으로 바뀌고 말았다.<끝>

전남타임스 후원

저작권자 © 전남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