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나주읍성 떠난 지 88년 만, 국립나주박물관에 임시안착&전라도 천 년 시대상 밝히는 단서, 원위치 복원 위한 연구 이뤄져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옮겨 온 ‘나주 서문안 석등(보물 제364호)’이 보존처리과정을 거쳐 국립나주박물관 중앙홀에 전시돼 고려시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널리 알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석등에 불을 밝혔던 당시 사람들은 시각적인 어둠만이 아니라 중생의 어두운 마음의 밤을 밝혀 모든 사람들이 지혜의 눈을 뜰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두었습니다. 석등의 귀환을 계기로 고려시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929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옮겨졌던 ‘나주 서성문 안 석등(보물 제364호, 이하 서문석등)’이 88년 만에 고향의 품에 안겼다.<본지 제300호 "보물 ‘서성문 안 석등’ 나주로 가져오자"제하기사 보도>

지난 11일 국립나주박물관(관장 박중환)에서는 오랜 객지생활 끝에 고향으로 돌아 온 서문석등을 환영하는 제막 점등행사가 성대하게 펼쳐졌다.

2013년 나주박물관 개관과 함께 꾸준하게 서문석등 반환운동을 펼쳐 온 나주시민들과 문화계 인사들은 서문석등의 귀환을 계기로 나주가 문화적으로 더욱 융성해지고 전라도 천 년의 자부심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을 소망했다.

서문석등은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고려 선종 10년(1093년), 흥룡사(興龍寺)라는 절에 세워졌다가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절이 훼철되면서 읍성 안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기단이 제각각 분리된 채 길거리에 방치되던 것을 일제가 보수한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으로 옮겨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게 된 것.
돌아온 석등의 팔각형 간주석(杆柱石)에는 1행씩 8줄의 명문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나주읍성의 안녕과 부귀를 얻고자 불감 1좌를 삼세불에 공양하기 위해 대안 9년 계유년, 곧 1093년 7월에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서문석등은 하대석보다 상륜부에 장식을 치중해 화려하게 꾸민 점을 비롯해서 화사석을 받침 없이 그대로 안치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 수법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1093년이라는 조성시기가 확실해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양식적 특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 석등을 중심으로 금산사 석등, 미륵사지 석등, 표충사 석등 등 고려시대 석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중앙박물관과 막후절충을 통해 석등 반환결정을 이끌어 낸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은 인사말을 통해 “올해는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국보 제295호 금동관이 출토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떠난 또 다른 보물 서문석등이 나주로 돌아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 관장은 “내년 전라도 정도 천 년을 맞아 서문석등이 전라도와 호남지역의 미래 천 년을 밝히는 새로운 등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강인규 나주시장도 축사를 통해 “앞으로는 원래 서문석등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흥룡사에 대한 문헌조사와 지표조사, 발굴조사 등을 통해 원래 유적의 본 모습과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과제”라고 밝히며 “이 고려 석등이 전하는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살려 나주의 자부심을 살리고 원 위치인 나주읍성 서성문 안으로 옮기는 과정도 심도있게 생각해 볼 과제”라고 전했다.

한편, 이날 서문석등 제막 점등식에 앞서 (사)국립나주박물관후원회(이사장 이순옥)가 주관하는 마한문화아카데미에서는 ‘고려시대 석등의 양식과 나주 서문석등(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사진으로 본 서문석등의 어제와 오늘(윤여정 나주향토사연구가)’ 강연회가 열렸다. / 김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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