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김홍남·며느리 원경희 조교와 전수자로 가업 계승

▲지난 10일 작고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 샛골나이 노진남 명인.
“그때는 큰애기(처녀)들이 베를 못 짜면 시집을 못 갔제. 울 엄니가 손이 칼칼해서 베를 잘 짠다고 칭송이 자자했는디 나도 호롱불 아래서 베를 짜던 친정엄니 어깨너머로 배웠응께.

그러다 울 아부지가 ‘다시 사는 우체국 총각'을 점찍어 시집을 보내서 이 집에 들어오게 된거제.”

한평생 베 짜기를 가업으로 이어오던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샛골 ‘직녀할매’ 노진남 명인이 지난 10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고인은 남편 최석보 씨와 슬하에 3남2녀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동서 김홍남과 며느리 원경희가 각각 조교와 전수자로 샛골나이의 업을 계승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 보유자인 노진남 명인은 1982년 제7회 전승공예대전에 무명베를 출품, 입선·장려상을 받았으며 1990년 나주의 샛골나이 보유자가 됐다.

나주의 샛골나이는 다시면 동당리 일대에서 직조되고 있는 전래의 고운 무명베를 일컫는데, ‘샛골’은 동당리 마을이름, ‘나이’는 길쌈을 뜻한다.

예로부터 나주는 개성, 진주 등과 함께 고운 무명의 산지로 유명했는데, 옛사람들은 나주에서 나는 고운 무명베를 '나주 세목(細木)'이라 하였다.

세목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목화가 좋아야 한다.

나주는 볕이 잘 들고 물이 풍부한 고장이라 풍성한 목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샛골의 여인들이 베를 잘 짜서 '샛골의 직녀들'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말이 전한다.

가늘고 곱기로 유명한 샛골의 무명은 비단보다도 더 곱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1968년부터 샛골의 직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을 모두 '샛골나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라져가던 재래식 무명짜기 전승을 위해 1969년 7월4일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이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하면서 고인의 시어머니인 김만애(작고)를 최초 보유자로 인정했다.

노진남 보유자는 전남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을 돌보며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길쌈을 배웠다.

혼인 후 시어머니인 김만애 보유자에게서 무명짜기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명인의 남편 최석보 씨는 한국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직장인 우체국을 그만 두고 도망 다녔고, 명인은 밤마다 베를 짰다.

한때는 열넷이나 되던 식구를 모두 노진남 명인이 무명베를 짜서 먹여 살렸다.

한창때의 노진남 명인은 이틀에 베 한 필을 짰다.

베 한 필로는 여름 옷 한 벌을 해 입을 수 있고, 두루마기 같은 옷을 만들려면 세 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해부턴가 베를 짜는 일이 뜸해졌다.

베를 짜는 것이 고된 노동이기도 하지만 짜도 팔 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전국에서 샛골나이를 구경 오는데다 “물레를 끊으면 우환 끓는다”는 말을 시집오기 전부터 들어왔던 터이리라.

노진남 명인은 2년 전 국립나주박물관 일원에서 열린 나주마한문화축제에 베틀을 가지고 나와 시연을 했다.

노구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베틀은 거대하고도 녹록치 않았지만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북을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관람객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것.

그 곁에서 명인의 남편 최석보 옹이 솜을 타는 모습은 ‘견우와 직녀’ 같은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으로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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