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나주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

지역경기가 날로 썰렁해지고 있다는 푸념들이 쏟아지고 있다. 상가를 돌아보아도 한 점포 건너 한 점포에 ‘임대’ 푯말과 함께 비어있는 현실을 보면, 8만 명대까지 추락했던 나주시 인구가 11만 명을 회복했다는 말은 원도심 상권을 비켜가고 있는 듯 보인다. 전국 대부분의 오래된 기성 시가지들이 옛 명성을 그리워하는 구도심으로 전락하고 있어 이는 나주만의 문제가 아닌, 도시재생의 근간인 동시에 지방자치단체 흥망의 열쇠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나주 원도심 상권을 살리는 일은 누가 할 것인가? 나주시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도 바꿔보고 간판도 바꿔보고, 주민들 스스로 상인대학도 운영해 보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빛가람혁신도시 실제 정주인구가 3만 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나주 원도심은 오래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도심슬럼화-인구감소-경제기반 약화-인구감소-슬럼화’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원도심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상점, 상인들이 있다. 그들이 나주상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전남타임스> 연말연시기획으로 나주의 상권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 편집자주 

과감한 투자로 ‘갤러리·카페·게스트하우스’ 관광 클러스터 구축

“나주사람 됐으니 나주와 함께 성공해야죠” 다부진 의지 다져

▲ 나주 원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눈길을 끌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의 남우진 대표

최근 나주 원도심의 밤을 밝히는 한 집이 있다. 나주시 향교길 42-16, 나주향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이다.

하지만 이곳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여전히 정의관집, 난파고택으로 불린다.

난파고택은 구한말 나주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난파 정석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향리들의 대부 격인 호장 정석진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군을 막아내는 주축으로 활약했던 인물. 당시 정석진은 수성군 대장(도총장)이었고, 민종렬은 토벌대장(초토사)이었다.

그는 동학농민군을 막아낸 공훈으로 해남군수로 제수됐다가 이듬해 일제에 의해 내려진 단발령에 반발해 본인이 의병의 의병장이 되고야 만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관군에 의해 진압되는 운명이 됐고 참수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됐다.
동학이라는 엄청난 물결에 휩싸였던 나주는 전라도의 중심을 광주에 내주어야만 했고, 동학혁명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이같은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공간이 바로 난파고택이다.

이곳은 정석진의 큰아들 정우찬이 살던 곳을 그의 아들 정덕중이 1939년 재건했다.

건축대서사였던 박영만이 설계하고 대목 김영창이 시공해 한옥과 양옥, 일본식 가옥의 양식을 적절히 조합한 현재의 건물을 탄생시켰으며, 1970년경 지붕을 보수하고 일본식 청기와를 새마을 청색 시멘트 기와로 교체하긴 했지만 원형을 건드리지 않은 상태로 보존돼 왔다.

그 곳을 발견해 낸 사람이 전주사람 남우진(44)대표다.

전주한옥마을을 일궈낸 투자자이기도 했던 그는 2015년 봄, 지인의 소개로 처음 이곳을 찾게 됐고, 한 눈에 투자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갈파했다.

집 뒤로는 금성산이 고려시대 호위무사처럼 양팔을 벌려 둘러서 있고, 그 아래 한수제가 펼쳐져 있어 춘하추동의 풍경이 그려졌다.

그리고 나주향교와 서성문, 나주천이 이웃하고 있어 나주목 천년의 역사와 문화, 생태가 한 데 어울리는 시간여행의 요새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남 대표는 그때의 느낌을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하얀 눈길을 발견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처음 세 명의 투자자와 공동매입했던 난파고택의 지분을 일원화 했다.

2년여 장고 끝에 지난해 7월부터 본격적인 리모델링을 시작, 5개월 만에 이곳을 갤러리, 카페&와인 샵,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 ‘1939년 나주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한다’는 뜻을 가진 ‘3917 마중’에서는 문화체험과 천연염색 작품전, 지역작가 기획전시, 청년예술가들과 함께 나누는 39-17 마중예술, 문화공연과 강좌 등의 행사를 겸할 수 있다.

‘1939년 나주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한다’는 뜻에서 ‘3917 마중’이라 이름지었다는 이곳은 다채로운 문화체험과 천연염색 작품전과 지역작가들의 기획전시, 연2회 청년예술가들과 함께 나누는 39-17 마중예술, 문화공연과 강좌 등의 행사를 겸할 수 있다.

처음 이곳에 투자를 할 당시 주변에서는 ‘시기상조’라며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남 대표는 “전라도 정도 천 년을 앞두고 전주에 이어 나주를 제2의 삶터로 삼게 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책임의식이 발동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이뤄진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된 데는 반세기 가까이 비어있던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달라는 ‘집터의 주인’들의 도움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한여름 ‘난초언덕’ 난파정 담장을 복원하는 과정에 큰매형, 작은매형이 총동원돼 직접 땀을 흘려 이뤄낸 만큼 남다른 애착과 자부심이 생긴다는 남 대표는 “전라도 정도 천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행사를 앞두고 ‘3917마중’이 전주와 나주를 잇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며 “나주사람이 됐으니 나주와 함께 성공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 김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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