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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70주년, 비극의 역사현장 걸으며 반성과 치유의 길 모색
‘쉼표가 있는 삶’ ‘사람이 있는 관광’으로 휴식권 보장, 사람중심 관광 우선돼야
2018년 04월 29일 (일) 21:19:00 김양순 기자 jn-times@hanmail.net

나주시가 관광객 200만 시대를 앞두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나주를 찾은 관광객은 약 16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보다 30% 증가한 수치로, 관광객 100만 명을 유치했던 지난 2015년 이후 단 2년 만에 16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특히, 올해는 전라도 정명 천 년을 맞아 전라도 3개 시도가 함께 추진하고 있는 각종 기념사업의 중심에 나주가 우뚝 서 있는 이유만으로도 관광객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이런 가운데 나주시는 올해 관광객 200만 명 달성을 목표로 국비 200억원을 들여 관광·생태자원을 활용한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시설을 잘 꾸며놓는다고 관광객이 늘어날 것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감추고 싶었던 옛 역사와 사건, 사고 등이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이에 전남타임스는 역사적 상처와 아픔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다크투어리즘’ 현장을 돌아보고 우리지역의 흑역사와 이를 관광자원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제주4.3 70주년을 앞두고 때 아닌 폭설이 내려 그날의 제주를 말해주는 듯하다.<4.3평화공원 광장에 설치된 70주년 추모탑>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제주의 아픔

70년 전 대한민국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사건이고 무고한 민간인들이 이념 대립에 희생된 처참하고 비극적인 역사이다. 하지만 그 세월에 비해 제주 4·3사건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지사장 나은미)에서는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아 3월 21일부터 사흘 동안 전국의 지역신문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억의 복원 70년 제주 4·3’ 현장연수를 실시했다.

광주공항에서 제주도에 도착한 일행은 막 꽃눈이 피어나는 화창한 봄날의 제주풍경을 기대했다가 놀라움에 빠져들었다. 제주 도심을 벗어나 4.3평화공원에 들어서는 사이 예상치 못한 눈보라와 까마귀떼가 일행을 맞았기 때문이다.

마치 70년 전 제주의 봄날을 말해주는 듯 했다.

일행은 제주 4.3평화공연 강의실에서 제주4.3연구자인 허호준 한겨레신문 부국장의 강의를 통해 4.3사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동과 진압 과정에서 주미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참여정부에서 출범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하지만 제주 4·3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제주도라는 지역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원인과 당시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왜 제주도였을까?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라는 특성을 지닌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8·15광복 후에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 주관으로 ‘기억의 복원 70년 제주 4·3’ 현장연수가 실시됐다.

돌아온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각종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 및 전염병들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으로 인한 식량난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아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로 변신하였으며, 군정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경제문제들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복합적 요인들이 얽힌 상황에서 1947년 이른바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제주 4·3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제주민들이 모여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기념대회를 하던 중 관덕정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파장은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3·10 민관 총파업은 경찰과 관리들도 참여,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을 관리하던 미군정은 경찰의 발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했다.

성난 민심을 군홧발로 짓밟으려 했으니

1947년 3월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의 경무부장 조병옥은 “3·1사건은 일종의 폭동이며 다른 지방의 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 잡겠다” 발표하였다.

제주도의 총파업 사태는 3월 말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경찰당국의 대량 검속이 진행되어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천500명이 구금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단체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사태를 경찰이 담당할 '치안문제'로 파악하였다.

미군정은 4월 5일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제주도 도령을 공포하여 제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여 제주도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사태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진압한다는 방침은 도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4월 18일 미군정은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4월 28일에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할 것 등을 합의하였으나, 5월 1일에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었다.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전국 유일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강경진압을 계속하면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지역문제가 아닌 이념대립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전쟁 보다 더 무서운 이념논쟁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고, 10월 17일 송요찬 제9연대장은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0월 18일에는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진압 군경과 여기에 가세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족 중에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기도 하였다.

1948년 12월 말에 조천면 북촌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400여 명의 주민을 무차별하게 총살한 이른바 ‘북촌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졌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거 예비 검속을 시행해 주민들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948년 한 해 동안 1만 4천~1만 5천명이 제주 도민들이 희생 됐다.

주택의 3분의 1이 파괴되었으며 제주도민의 4분의 1이 해안마을로 강제 이주 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제주 4·3사건은 이후 지역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4·3사건의 희생자 가족일 뿐임에도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연좌제’ 등 정신적 피해가 심각했다.
지역민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됐다.

다음 호에서는 실제 4.3사건의 현장을 돌아보며 당시 학살상황을 경험했던 목격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4.3사건을 조명해 본다.
/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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