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태 “왜 지금 다시 진상규명이냐고 묻는다면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 & 나의갑 “세계가 알아주는 5·18 내부 들여다보면 진정 ‘광주화’는 이뤄졌는가 의문” & 박순영 “5·18 당시 헌신했던 여&

5·18 39주년 아직도 진상규명인가?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1980년 5월 열흘에 걸쳐 진행된 5·18민주화운동은 사망자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군부독재와 보수정권 아래서 심하게 왜곡되고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왜 없는가? 균형 잡힌 정의의 완성만이 진상규명이 절실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제정되었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상태다. 
5·18 진상규명에 대해새로운 시각과 기준으로 5·18의 역사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문민정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의도와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대법원이1997년에 5·18, 12·12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된 것이다.

조진태 상임이사는 “5·18특별법 통과에 따라 암매장 발굴작업과 발포명령자 규명과 관련해  관련자들을 찾아 구술 받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면서 “헬기 기총소사, 암매장, 주남마을 미니버스 집단학살과 송암도 마을 집단학살 같은 익힌 사건들과 실종자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5월 21일 집단발포의 배경과 교도소 습격사건 같은 5월 당시 현장상황을 조작한 것들과 권일운 일병의 사망 경위 조작, 고정간첩에 의한 폭등 같은 5월 당시 현장상황을 왜곡하고 5월 이후 기록물을 통한 왜곡 들을 바로 잡는 일이 우선 돼야 한다”고 힘주어 밝혔다.

금남로 한복판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나의갑 관장 “기록은 기억을 위한 노력”

옛 광주가톨릭회관을 개조해 80년 5월의 광주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을 영구보전하고 전시하기 위해 광주시가 2015년도에 설치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전국의 5·18들-스스로 오월의 영령이 된 열사들’을 주제로 다음달 6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오월의 아픔을 기억하고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된 80년대 전국의 5·18 열사 127명을 기리는 기획전을 갖고 있다.

'전국의 5·18'은 문재인 대통령이 제37주년 5·18기념식에서 광주정신으로 삶을 살다 죽음을 택한 열사 4명을 호명하며 '전국의 5·18'이라 부른 것에서 작명했다.

이덕재 5·18기록관 학예연구사는 "1980년 5월의 영향을 받았던 그 당시 젊은이들 모두가 광주의 5·18이라는 의미에서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시실에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직후 맨 처음 광주정신을 외치며 목숨을 끊은 서강대 학생 김의기 씨 이후 광주의 참극을 목도하거나 알게 된 뒤 전두환 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던 전국 민족민주열사를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광주를 비롯해 서울, 부산, 목포, 인천 등지의 대학생, 노동자, 택시운전사 등 1980년부터 1989년까지 광주정신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문사한 이들이다.

기념관을 돌아본 뒤 기자들 앞에 선 나의갑 5·18기록관장은 "광주에서 10일간의 비극은 끝났지만 5·18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전국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기자로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했던 나 관장은 “5·18 진상규명이 시대적인 과제로 떠오른 엄중한 상황이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5·18의 진실된 역사가 반듯하게 세워지도록 지렛대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먼저 “5·18이 생산한 광주정신은 불의에 대한 저항, 전 국민을 위한 희생, 인간의 존엄과 인권·평화·연대이다”고 규정했다.

특히 “5·18은 6월항쟁 등 대한민국의 민족·민주운동의 추동력이자 자양분이었다”며 “오늘날 우리가 이 만큼이라도 누리고 있는 민주와 자유도 1980년 5월 광주가 뿌린 피의 덕분이다”고 강조했다.

나 관장은 “5·18의 전국화는 세계화보다 오히려 더디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특히 내부를 들여다보면 진정 ‘광주화’는 잘 이뤄졌는가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5·18 당시 민주성회가 열렸던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고 옛 전남도청과 상무대 영창 등도 원형을 많이 잃었다”며 “미국이 남북전쟁 당시 떨어진 포탄 자국 하나까지 지금껏 보존하는 것처럼 낡으면 낡은 대로 5·18의 흔적들을 그대로 보존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의 새벽을 깨운 그 여성 
…박영순 오월민주여성회 부회장

올해로 환갑에 접어 든 박영순 씨에게 듣는 당시 상황은 눈물겹다 못해 목울대가 뻐근해지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박 씨는 마지막 항전지 전남도청에서 오일팔 시민군 방송요원으로 활동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날의 방송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박 씨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시민군이 머물고 있던 전남도청 1층 상황실 옆 방송실에 앉아 있다 마이크를 켰다. 

탁자 위에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김종배 위원장이 작성해 넘겨주고 간 방송원고가 놓여 있었다. 

박 씨의 목소리는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를 통해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에 숨죽이고 있던 광주시내 곳곳에 파고들었다.

세 차례에 이어진 방송은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말로 끝냈다. 뒤탈을 우려해 손바닥 크기의 방송원고를 씹어서 삼킬 무렵, 정전과 동시에 계엄군이 방송실을 덮쳐 개머리판으로 왼쪽 뒷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 “방송한 년 누구야? 갈갈이 찢어죽이겠다”던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박 씨의 가슴에 박힌 채 살아야만 했다던 박 씨.

박 씨는 고문 등 온갖 수모를 겪은 뒤 내란부화수행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그해 10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당시 박 씨는 스물한 살 가야금을 전공하던 예술대 2학년 재학생으로 모교인 광주여고에서 동아리활동을 지도하던 중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도 머지않아 열리는 호남예술제에 학생들을 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지도하고 돌아가던 중 생면부지의 낯선 청년들로부터 “차에서 방송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집까지 데려다 둘 차를 얻어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량에 탑승하게 됐고 가두방송을 하다가 집에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뒤 다시 차량 가두방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방송요원으로 활동하게 됐고, 결국 마지막 항전지 도청에서 새벽을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박 씨는 아직도 남은 고문후유증을 치료하며 오월민주여성회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박 씨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바로잡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김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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