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 기획…나주관광의 재발견③ 역사인물 살려서 나주독립만세를

도심 한복판 조정인 의병장 생가 오리무중, 무속영업집으로 내 준 이광춘 선생 생가
도시재생·역사인물콘텐츠 개발로 전성기 맞은 밀양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와 비교돼

전라남도가 ‘남도의병역사공원’을 건립한다며 지자체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나주시를 비롯한 도내 13개 시군이 유치전을 벌이고 있다.

나주시도 1000여명에 이르는 유치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서명운동과 동영상 응원릴레이, 학술행사, 유치기원 음악회까지 잇달아 개최하면서 여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의병이 누구인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뜻있는 백성들이 나라의 부름이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겨레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무장을 갖추고 외적에 대항해서 목숨을 바쳐 싸운 민병들이다.

후세가 이들의 숭고한 얼을 기리는 일은 의무이자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2010년 대통령령으로 6월 1일을 ‘의병의날’로 제정해 국가기념일로 지내오고 있다. 그런데 나주시와 전라남도는 제대로 된 기념식이라도 가졌던 적 있던가?

경북 청송군은 2011년도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을 조성해 전국의 의병을 기리고 있다.

이곳 홈페이지에 소개되고 있는 전국도별 의병유공 서훈 선열들은 지난해까지 총 2천596명. 지역별로는 경기도 250명, 충청도 297명, 강원도 140명, 함경도·평안도·황해도 133명, 경상도 557명인데 전라도가 738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지역이 밝혀지지 않은 유공자도 476명이나 된다.

그런데 나주 출신 형제의병장인 김태원 의병장과 김율 의병장의 출신지가 각각 영암과 장성으로 기록돼 있다.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고향 나주는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최근 항일운동콘텐츠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경남 밀양과 나주 의병들의 생가터, 묘소 몇 곳을 돌아보았다.

/ 편집자 주

 

항일독립의 함성 되살리는 밀양

한낮의 기온이 35℃를 웃도는 8월의 첫 주말, 나주 비단송시낭송회와 협동조합 성안사람들 회원 32명이 밀양탐방에 나섰다.

한국관광공사가 올해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꼭 가 봐야 할 여행지로 추천한 고장이다.

그리고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배역을 맡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고 인사하던 그 사람의 고향이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과 더불어 독립투쟁사 ‘양대산맥’을 형성했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1898~1958?).

약산은 1920년 9월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에 의한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 등 20여 차례의 일제 주요시설 폭파 및 고관·친일파 암살 기도를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1938년에는 조선의용군을 창설했고 1940년 이후 임시정부에 투신해 광복군 부사령관과 군정부장, 국무위원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백범(당시 60만 원)보다 많은 100만 원(현재 화폐 추산 320억 원)의 최고 현상금의 주인공이면서도 일경에 체포되지 않았던 그는 해방 후 남과 북 양쪽에서 버림받았다.

좌우합작을 주창한 몽양 여운형을 돕던 김원봉은 악명 높은 친일경찰 출신에서 해방 후 경찰 고위직으로 둔갑한 노덕술에게 한밤 중 내의차림으로 끌려가 “공산주의자 아니냐”며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수차례 암살 기도를 당하고, 여운형까지 암살되자 그는 살기 위해 북쪽을 택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후 10년간 약산은 노동상 등의 보직을 맡지만, 김일성 일파로부터 ‘민족주의파’라고 비판받고 1958년 숙청당했다.

김원봉, 엇갈리는 평가 속에 비운의 가족사 

▲ 밀양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조성사업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김원봉과 박차정

그의 월북으로 형제 중 4명과 사촌 5명이 전쟁 때 총살당했고, 부친은 굶어 죽었다.

형제 11명(9남 2녀) 중 유일하게 살아 있던 막내 동생 김학봉 여사는 지난 2월 24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약산과 34년 터울로, 월북 직전 단 두 번 만난 것이 전부인 고인도 서울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심문을 받아야 했고, 남편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으며 아들들은 고아원에 가야 했다.

고인은 2005년 이후 약산의 서훈을 신청했지만 그때마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급기야 지난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청와대 국민청원에까지 ‘약산 김원봉에 대해 서훈을 해달라’는 청원이 제기됐지만, 청와대는 “서훈이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의 8번 항목을 보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및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거나 정부 수립 이후 반국가 활동을 한 경우 포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반일 감정이 들끓는 가운데 밀양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인구 10만 명 남짓한 소도시지만, 항일 독립투사를 80명 넘게 배출한 독립운동의 고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오랜 세월 ‘김원봉’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지만, 근래 들어 약산의 태생지인 밀양시 내이동 해천 주변에는 김원봉, 윤세주, 최수봉 등 항일 독립투사의 삶과 애국정신을 기리는 사업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가 대표적이다.
 

▲ 과거 밀양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600m 남짓한 해자천을 복원하고 주변에 의열기념관과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를 조성했다.

도시재생과 해자천 복원으로 되살아나는 밀양

해천은 왜구의 노략질을 막으려고 밀양 읍성 주변으로 만든 해자인데, 해자천으로 불리다 줄여서 해천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해천 주변에서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고 자랐다. 밀양이 배출한 독립운동가 82명 가운데 26명이 이곳 출신이다.

600m 남짓한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중심에는 의열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원을 기리는 공간이다.

지난해 3월 문을 연 의열기념관은 대지면적이 132㎡에 불과한 작은 기념관인데, 요즘 부쩍 방문객이 늘었다.

황선미 밀양시문화관광해설사는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연초부터 방문객이 늘고 있는데 최근 반일정서때문인지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가족과 단체의 방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서 “‘의로운 일을 맹렬하게 행한다’는 의열단의 정신에 공감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도시재생사업 활동가로도 참여하고 있다는 황선미 씨는 “2017년부터 추진된 도시재생대학과 사업추진협의회 활동 등을 통해 주민들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자발적으로 마을발전에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확산되었다”면서 “해자천 복원사업에 김원봉 등 독립투사들을 기념하는 사업을 얹음으로써 밀양이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시는 도시재생과 해자천 복원사업을 계기로 원도심을 활성화 하고 시민들을 도심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주역으로 내세우는 데 행정적인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준비된 역량을 바탕으로 올해 상반기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에 선정돼 지난 십여 년간 낙후된 채 방치돼온 밀양역 주변을 문화·건강·예술·창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켜 나가고 있다.

‘밀양의 문(門), 상상을 펼치다’를 기치로 올해부터 2023년까지 5년간 총 374억 원을 들여 추진하는 사업은 주민 간 교류와 문화 복지 등 증진을 위한 생활SOC를 공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나주의 의병들, 그들의 발자취는 어디에? 

나주로 돌아와 이 지역 의병들과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참담한 광경이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자 최후의 증언자였던 이광춘 선생의 나주시 남외동 58(남외2길 4) 생가는 무속인의 간판과 깃발이 나부끼고 있고, 주변은 중고가전제품들과 쓰레기봉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인 옛 나주역에서 이광춘 선생의 생가까지 훤하게 뚫린 넓디넓은 도로는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 채 광복절을 맞아 내건 태극기만 축 늘어져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곳, 호남의 대표 의병장 중 한 손에 꼽히는 김태원 의병장의 생가를 찾았다.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249(상하길 17) 김준(태원)·김율 형제의병장의 생가는 시멘트 블록 담장과 녹슨 철제대문의 평범한 주택이 자리하고 있어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누가 알까마는 다행히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말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김준 선생(1870~1908)은 어린시절 유학을 배웠고 힘이 장사였다.

25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귀가한 뒤 1896년 경기의병 의병대장 민승천의 선봉장이 되어 수원과 남양 등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리다 나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7월 동생 김율 등 수백명의 항일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대와 친일세력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07년 호남의병회맹소 기삼연 대장과 합류하여 장성과 법성포 등 어려 곳에서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후 12월 나주 사호(지금의 광주시 사호동) 전투에서 일본군 200명을 사살하고 담양 남면 무동촌 전투에서는 광주지구 수비대장 길전 부대를 전멸시키기도 했다.

이후 여러 곳에서 전투를 하다 1908년 3월 25일(음력 5월 25일) 어등산전투에서 악전고투하다 박산마을(지금의 광주 박호동)에서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공훈 훈장이 추서되고 광주시 농성동에는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나주 남산공원과 함평군 기산공원에도 충혼비가 있다.‘

선생의 생가터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었을 뿐인데도 그가 얼마나 용맹하고 대단한 인물이었던가를 알기에 충분했다.

▲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나주시 산정동 조정인 의병장의 생가터

그를 도와 활동한 단암 조정인 의병장. 그의 생가터는 나주시 산정동 45-3(과원길 33)으로 기록돼 있다. 나주읍성 한 복판 금성관길에 인접해 있는 생가터에는 문패도 이정표도 없다.

한 건설사의 조립식 건물과 너른 마당에 고추를 널어놓은 풍경이 이게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의병장에 대한 후손들의 대접인가 싶어 목울대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선생은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더 이상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좌시할 수 없어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1907년 12월 6일 호남의병장 김태원, 김삼연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총기 4백여 정으로 무장시켜 헌병대 및 경찰과 접전을 전해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나주 가산(가야산)에서 의병 심수근과 함께 탄약을 제조하던 중 일본헌병대에 체포당했다.

그 후 광주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와 상고를 했으나 모두 기각되고 1909년 1월 18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돼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나주시 남외동 55(남외2길 4-6)에 독립유공자의 집(조정인)으로 패가 걸려있으나 이곳은 선생이 거주하던 곳이 아니고 후손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또한 선생의 묘소가 나주시 송월동 737번지라는 기록이 있어 찾아가 보려 했지만 송월배수장 언덕배기에서 길이 막혀 있다.

나주문화예술회관 주차장 뒷산 묘소가 선생의 것이 아닐까 짐작될 뿐이다.

하산 김철 선생의 묘소는 나주북초등학교 쓰레기분리수거장 뒤편에 안장돼있지만 그마저도 담장이 쳐지고 자물쇠가 걸려있어 3월 1일 지역의 뜻있는 몇몇 사람들만 참배할 뿐이다.

나주시가 남도의병역사공원을 유치하기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나주시가 유치신청서에 제안하고 있는 부지가 영산강을 낀 공산면 영상테마파크 부근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나주시는 과연 남도의병을 기리기 위한 역사공원의 근본 취지를 알고 덤벼든 것인지 묻고 싶다.

지금까지 푸대접해 온 나주의병들과 독립투사들의 존재부터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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