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선 본지사장
‘정의’라는 말이 회자(膾炙)되는 시대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미국 학자의 책이 100만부 판매의 기록을 세웠다.

읽기가 결코 쉽지 않은 외국 인문 서적의 이런 판매 실적은 지금 한국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정부가 ‘공정’을 국정 지표로 들고 나온 이유도 이와 같은 민심의 추이를 파악한 결과일 것이다.

정의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체제에서나 항상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또한 정의가 국가 권력에 의해 완벽히 구현된 경우는 많지 않다는 걸 역사는 일깨운다.

우리의 현대사만 보아도 이는 분명해진다.

가장 권위적이었던 군사정권시절, 집권당의 당명에 ‘민주’와 ‘정의’를 함께 붙여 썼다는 사실은 정치권력에 의한 정의의 왜곡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국가운영이나 사회기류에서 정의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 인간의 삶에서 또 다른 미덕인 ‘관용’의 기품이 퇴색할 우려가 제기된다.

정의와 관용은 반대 개념은 아닐지라도 이를 동시에 구현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적어도 법의 운용과 사회 규범의 적용에서 그 두 가지 가치는 충돌위험을 배제하기 어렵다. 정의가 원칙의 고수라면 관용은 예외의 인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연히 목격한 일이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속으로 젊은 여성이 황급히 밀고 들어왔다.

 원칙으로는 노약자나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젊은이는 이용을 삼가야 하는데 그 젊은 여성은 만원 엘리베이터에 들어왔음으로 그 원칙을 여긴 꼴이다.

엘리베이터가 개찰구 입구로 올라가 멈추고 젊은 여성이 빠져 나가자 두 할머니가 의견을 토로했다.

한 할머니는 “왜 젊은 애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거야”라고 힐난했고 다른 한 할머니는 “바쁜 출근 시간이니깐 이해해야지요”라고 두둔했다.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례이긴 하지만 정의와 관용, 원칙과 예의가 충돌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 할 듯싶다.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서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가,

에이미 추아 미국 예일대 법대 교수가 쓴 ‘제국의 미래’ 라는 책을 참고 할 만하다.

저자는 로마와 몽골? 영국? 네덜란드 등 역사 속 동? 서양 강대국들의 흥망성쇠 과정을 살펴보면 이 나라들의 번영에는 시대나 지역 인종?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지만, ‘관용’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고 설파한다.

권력으로 대표되는 구조적 거악(巨惡)은 당연히 ‘정의의 칼’로 척결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고달픈 민생에는 관용의 손길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두 길은 병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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