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헤치고 기지개켜는 첫봄의 요정…노루귀(獐耳細辛)

학명: Hepatica asiatica Nakai
쌍떡잎식물강 미나리아재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 김진수 전남들꽃연구회장

이른 봄 기지개를 켜고 가망가망 양지쪽 산모롱이를 걷노라면 군데군데 잔설을 피해 갈색의 눈길을 빼앗는 꽃이 있다.

입춘(立春)이라고는 하나 아직 뼛속까지 시린데 이파리 한 장의 홑옷도 없이 얼굴을 내민 어린「노루귀」다.

가난한 시골 소녀 같다. 부지런한 꽃이 먼저 일어나면 게으른 잎은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부스스 잠을 깨어 두 귀를 쫑긋거린다. 긴 솜털로 가득한 이파리는 참 ‘노루의 귀’를 닮기도 닮았다.

학명 중 속명인 헤파티카(Hepatica)는 간장(肝腸)이라는 뜻의 헤파티커스(hepaticus)에서 유래하는데 세 갈래의 잎가장자리가 간의 모양을 닮아 생겨난 이름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루귀를 파설초(破雪草: 눈을 헤치고 피어나는 풀) 또는 설할초(雪割草: 눈을 가르고 피어나는 풀)라 불렀는데, 장이세신(獐耳細辛: ‘노루의 귀를 닮은 족두리풀’의 뜻으로 두통, 치통, 근육통 등의 동통에 활용한다.)이라는 약명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세신(細辛: 쥐방울덩굴과 ’족두리풀‘의 약명)이란 뿌리가 가늘며 맛이 매워서 붙여진 한자이름인데, 이도 감기에 의한 오한이나 두통, 몸살의 ’진통‘에 쓰인다.

한편 ‘노루’를 앞세운 기왕의 노루오줌(노루의 오줌냄새가 난다)이나 노루발풀(잎 모양이 노루의 발자국과 비슷하다)에 비하면 ‘노루귀 잎’은 노루의 이마 위에 올라앉은 듯 여간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다. 꽃의 직경이 1.5cm로 작으며, 꽃빛은 흰색, 분홍, 진홍, 남색 등으로 싱싱하다. 키는 겨우 10cm 가량이다.

그러니 노루귀를 대할 때 어른 키의 높이에서 굽어보면 서로 간 새침해질 수밖에 없다. 오체투지로 납작 엎드려 노루귀의 귓구멍과 수평을 유지하면 참 알 수 없는 눈빛과 호흡의 교감을 꽃잎과 나눌 수 있다.

꽃도 더 이상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예의 수줍고 해맑은 미소로 턱밑에 다가온다. 근연식물로는 한국 특산의 새끼노루귀(노루귀보다 더 작다)와 섬노루귀(큰노루귀: 높이 20cm 안팎)가 더 있다.

비록 조촐하고 소박할지라도 노루귀는 자신들에게 가장 마땅한 생활 터를 골라 그들만의 행복한 마을을 꿈꿀 줄 안다. 그들의 삶터는 길섶과 기슭을 따라 가시덩굴 우거진 잡목림과 낙엽 층이 두터운 산자락들을 두루 가리지 않는다.

바람은 이마 위로 가볍고, 나무들 사이 아직 잎눈이 트지 않아 햇살 바른 때. 쌓인 낙엽은 연약한 꽃대를 잘 지탱해줄 것이며 얼어붙었던 돌각구들도 따뜻이 데워줄 것이다. 또 찔레덤불이나 산딸기, 청미래덩굴 같은 가시울타리 터는 멧돼지나 고라니의 발굽에도 차일 걱정이 없다.

노루귀는 흐리거나 비오거나 어두워지면 꽃잎(꽃받침잎)을 모두 접어버린다. 그러니 맑은 날을 잘 잡아야 정답게 소풍을 즐길 수 있다. 아리잠직한 우리 아이들의 눈과 귀도 그러하리라. 학교서든 집에서든 눈높이를 맞추어 낮게 불러주면 닫았던 귀를 열고 잠꾸러기 어깨도 곧잘 기지개를 켤 것이다. 노루귀의 꽃말이 ‘인내’고 또 ‘믿음’인 것이 여간 살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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