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관묘세력, 대한해협을 건너다

◇김창원 주필
1996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서 아파트형 고분이 발굴된 뒤 한반도 고대사의 최대의 미스테리인 영산강유역고대사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같은 영산강옹관묘세력이 백제의 지방호족 중의 하나일 거라는 설은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후 많은 학자들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마한 또는 그 잔존세력이고, 둘째는 일본의 조상인 왜가 한반도의 남부지방에 있었다는 한반도 왜(倭)설이다.

첫번째, 옹관묘세력이 마한일 것이라는 설은 지금 일부 학자들과 현지 주민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국내사료인 삼국사기에 의하면 마한이 1세기에 망한 것으로 명확히 나와 있고, 중국 사료를 보더라도, 3세기 이후 마한이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세력의 유물과 유적은 3세기부터 시작해서 6세기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옹관묘세력을 마한이라고 보기에는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뭔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애기다.

둘째, 한반도에 왜가 있었다는 설이다. 이설은 많은 학자들이 일본이 한반도에 식민지를 가졌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아류쯤으로 인식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설은 임나일본부설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한반도의 어느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얘기고, 한반도 왜(倭)설은 이 지역에 살던 어느 집단이 일본열도로 이주했다는 애기다.

좀 더 나아가 그 세력이 중심이 돼서 일본의 천황가를 이루고, 일본열도의 주도세력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 이론적 근거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본 큐슈 북서부지방에서 나오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영산강유역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어떤 문물을 전파했다거나,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바로 똑같은 집단으로 본 것이다.

지금과 같은 민족주의가 형성되기 전 바닷길에 익숙한 한반도 서남해 해양세력의 일부인 영산강옹관묘세력으로써는 자연스러운 일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설은 학계와 지역민들로부터 오랫동안 외면받아 왔다.

지난 역사 속에 우리 민족을 괴롭혀온 일본과 연관지어지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 그런지 학문적 반증이나 설명도 없이 그냥 기피해 왔다.

그런던 중에 2005년 나주 다시면 영동리 고분에서 5-6세기 것으로 고분을 발굴하는 중에 거의 훼손되지 않은 23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다른 어느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좋은 상태로 보존이 돼있어서, 전문기관에 1년 이상 의뢰한 끝에 이 인골의 DNA의 분석결과가 나왔는데, 내용이 아주 충격적이다.

이 나주 영동리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의 DNA가 같은 시대의 신라나 백제, 가야의 것보다는 현대 일본인 특히 큐슈지방의 일본인과 DNA가 똑같다는 것이다.

이 분석결과는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세력이 어떤 정치 사회적 충격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큐슈지역으로 대규모로 집단이주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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