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선 사장
청소년은 어디에서든 언제든 항상 미래의 주인공이었고 다가오는 시대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될성부른 나무로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갑기만 하다.

각종 청소년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느까는 대표적 감성이 첫째는 ‘버릇이 없다’ 이고 둘째는 ‘여유가 없다’이다.

하기야 청소년의 버릇없음이 이 시대의 특징만은 아니다.

성서의 구약에 ‘자녀를 훈계치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경구가 있는 것을보면 기원의 오래 전부터도 청소년들은 채찍으로 때려 다스릴 만큼 버릇이 없었던 게 틀림 없다.

다만 죽을 만큼 때려서 훈계함으로 미래를 맡길만한 제목으로 키워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자녀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
자녀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려하기보다는 감싸주는 것이 기를 살려주는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기를 살려주려다가 장래를 망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의 말버릇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청소년들의 일상대화를 들어보면 세 마디 중 한 마디는 욕설이다.
‘씨발’ ‘존나’ 등 그 어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냥 습관적으로 내 뱉고 있다.

또 세 마디 중 한 마디는 토막 영어이거나 네티즌 언어이고 겨우 한 마디만 우리말인데 그것도 온전한 우리말은 아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언어습관, 걷잡을 수 없는 수동태 표현. 사람이 아닌 사물에 대해 쓰는 극존칭, 끝 음절을 길게 늘여 빼는 말투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암기력은 세계 제 1수준이다.

거의 대형컴퓨터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머릿속에 잔뜩 전장만 해놓았을 뿐 그것을 꺼내어 적절하게 활용하는 데는 매우 서툴다.

더구나 응용하고 확장하고 변형하는 능력은 안타까울 정도다. 창의력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이다.
빛의 속도가 1초당 30만km라는 것은 금방 기억해 낸다.

하지만 생각의 속도가 빛의 소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을 유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씨앗의 그림을 보여주면 무슨 씨앗인지, 볶아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간파해 내느라 골몰한다.

그 씨앗 속에 줄기와 이파리와 아름다운 꽃의 인자가 숨겨있다는 사실에는 머리가 가닿지 않는다.
한가지만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단순비교식, 주입식 교육환경에 젖어서이다. 각 급 학교에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한다는 원대한 취지로 영어 교육에 몰입하고 있지만 글로벌의 시작점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짝궁과의 관계라는 인식을 키워주지 못하는 맹점을 보이고 있다.

청소년은 분명 우리의 미래다. 불과 몇 년 후면 지구촌을 활동무대로 삼아 눈부신 활약을 펼칠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잘못된 버릇을 펼칠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잘못된 버릇을 교정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키울 수 있도록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무임을 자각해야 한다.

힘이 들더라도 가르칠 것은 가르쳐야 미래를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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