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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전라도… 4 (마지막회 )
노량해전과 비총(鼻塚)
2009년 10월 26일 (월) 20:10:17 전남타임스 jn-times@hanmail.net

   
김창원  주필
r필자가 삼년 전까지 살았던 나주시 부덕동 과수원과 인접한 곳에 묘가 잘 정돈된 묘가 있었는데, 이 묘의 주인은 나주 세지출신이며, 광양현감으로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 참전해 전사한 김홍(金弘)장군의 묘이다.
김홍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단위 지휘관이었다.

이순신함대가 벌였던 23번의 해전에서 일본수군이 12만 명이 전사한데 반해 아군의 전사자는 1,000명에 불과했다. 특히 단위지휘관의 전사는 11명 뿐이었는데, 그 중 10명이 7년 조?일(朝日)전쟁의 마지막해전인 노량해전에서 발생했다.

나머지 한명은 1592년 9월초의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정운(鄭運)장군(녹도만호, 영암출신)이다.

이는 이 해전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 적의 피해도 아주 많았다. 적함 300척 중 200척은 침몰됐으며, 100척은 대파(大破)돼 도망갔다. 적의 전사자는 5만3천3백명이나 되었다.

7년간 23번의 해전에서 전사한 적 12만6천의 42%가 한번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동안 23번의 해전에서 평균 5천5백명이 죽었는데, 노량해전에서는 그 10배의 일본수군이 사망했다.

명량해전을 마친 이순신함대는 그해 겨울 영산강 입구에 있는 고하도에서 3달 만에 전함 29척을 새로 건조하고, 다음해 봄 42척의 전함을 이끌고 고금도에 해군사령부를 설치한다.

장군은 고금도로 옮긴 후로도 여름까지 다섯 달 동안 43척의 전함을 더 건조해서 함대를 85척으로 증강시킨다.

1598년 7월 18일 일본함대 100여척이 고흥 녹도로 침범하자, 이순신함대는 즉각 출동해서 녹도와 금당도의 중간에 있는 절이도(折爾島, 고흥 거금도)앞바다에서 적을 격파한다.

이 절이도 해전에서 적함 50척이 침몰당하고 일본수군 16,700명이 사망한다. 이 해전으로 적의 거점기지였던 고니시의 순천왜성이 봉쇄된다.
1598년 8월18일 풍신수길이 죽자,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에 여러개의 왜성을 쌓고 버티던 일본군은 철군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순신함대는 9월20일부터 10월4일까지 육군과 합동으로 고니시의 순천왜성을 공격한다.

고니시는 10월10일을 기해 일본으로 철군하기로 결정한다. 15,000명의 고니시부대는 이순신의 해상봉쇄를 뚫고나갈 방안을 모색한다.

고니시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과 이순신에게 철군의사를 밝히고 협조를 청하자 진린은 이에 응했지만 이순신은 거절한다.

고니시의 적극적인 뇌물공세로 명의 진린제독이 이순신에게 강력히 철군을 명령했지만 이순신은 끝까지 해상봉쇄를 풀지 않는다.

이에 고니시는 인근의 일본군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병 6만명이 전함 300척을 타고 진격해 온다. 여기에 응전해 격파한 것이 노량해전이다.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풍국신사(豊國神社, 풍신수길의 사당)앞에 이총(耳塚, 귀무덤)이 있는데, 이곳에 임진왜란때 베어온 조선인의 코가 20만개가 묻혀있다.

 원래 비총(鼻塚,코무덤)인데 자기들의 잔학성을 은폐하고자 후대에 이름을 비총에서 이총으로 바꾼 것이다.

임진년 4월에 시작한 전쟁이 초전(初戰) 두 달 만에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이 점령되지만 조선수군의 연전연승으로 해상수로가 봉쇄되고, 이로 인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돼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다음해 6월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남해안으로 물러나면서 왜성을 쌓고 강화회담을 하면서 3년 반 동안 휴전상태에 들어간다.

 3년 반의 휴전 끝에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일본군이 다시 공세로 돌아선 것이 정유재란이다. 1596년 초의 일이다.

정유재란 때 왜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강항(姜沆)의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의하면 “ 풍신수길이 말하기를 ‘매해 조선에 출병하여 조선사람을 모조리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후, 서부사람을 조선으로 이주시키고, 동부사람을 서부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성공할 것이다.’라 하였다.”

 풍신수길의 전쟁목표는 조선인 전체를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

 전쟁이 그칠 새 없었던 우리역사 5000년 동안, 이렇게 참혹한 전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전쟁 후 우리 인구는 400만에서 200만으로 줄어들었다.

이때 참전한 일본군이 욕심내는 것 중의 하나가 조선인 포로를 산채로 잡아가는 것인데, 이에 풍신수길은 조선인 코를 한 되 바친 병졸만 포로의 개인소유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은 생사(生死)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내어 조선인포로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참으로 끔찍하고 더러운 전쟁이었다.

 정유재란의 접전지역이 주로 전라도이다 보니 피해가 전라도가 특히 심했다. 우리자료나 일본의 전쟁자료에도 전쟁 후 50년, 70년 후에도 전라도에는 코 없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이 말은 4-5세의 어린이의 코까지 베어서, 소금에 절여 담아갔다는 얘기다.

이순신의 전라도함대는 이런 잔학한 일본군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이전의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근접전을 될수록 피해왔으나 마지막해전인 노량해전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 치열한 전투에서 이순신도 전사하고 단위지휘관이 10명이나 전사하고, 수병 300여명이 전사했지만 일본군 5만3천여명 살상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임진왜란의 마지막해전인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전라도함대가 풍신수길을 앞세운 일본이 일으킨 더러운 전쟁에 대해서 준엄하게 응징한 전투이다.

이로 인해 과거 수백년 간 남해안 일대를 황해하던 무법자 왜구의 출현이 노량해전이후 300년 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렇듯 임진왜란은 전라도민이 수행한 전쟁이었다.

 며칠 전 진도지역에서 치러졌던 명량대첩축제에 맞춰 임진왜란 당시의 전라도민들의 활약상을 소개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된 것이 4회 연재까지 오게 됐다.

이순신 장군의“약무호남이면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앞으로도 우리 전라도민들의 긍지로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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