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달리 독일정부는 그들의 과오를 백배사죄하면서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복지를 위한 전쟁부담금을 마련하기위해 100년동안 노력 중이다.

▲김남홍  본지사장  
작은 나라지만 관광부국으로 힘을 갖은 나라 체코를 뒤로하고 아침 일찍 마지막 여정인 폴란드로 가기위에 아우토반 고속도로에 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이미 가을걷이가 끝났지만 끝도 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밀밭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선 폴란드 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우슈비츠포로수용소와 교황 요한 바오로2세다.
요한 바오로2세의 고향 바도비체를 지나 수용소로 향했다.

가는 길도 한적한 시골길이며 이따금 보이는 방문객을 태운 버스 외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길이다.
우리가 탄 버스안도 왠지 다들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아우슈비츠 역에 도착하여 간단한 점심을 했는데 좀 짜고 느끼한 음식은 동유럽음식의 기본인 것 같다.
PKD마크가 새겨진 아우슈비츠 역은 지리적으로 유럽 중앙부에 위치해 2차 세계대전 당시 각지에 있는 유태인, 집시, 나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철도를 이용해 수용하기 적합한 곳이었다고 한다.

역사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수용소가 있었으며, 도착하여 수용소를 보니 2중철조망과 그 사이로 탈주를 막기 위에 고압전기를 흘려보냈던 흔적을 보면서 그들의 잔악상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수많은 사람을 끌어다가 20%는 살면서 노역이나 생체실험을 하였고 80%는 참살을 하였다고 한다.

60년 전 평화스럽던 한 조용한 시골마을에 광신자 나치에 의해 철의 장막이 쳐지고 600만 명이 희생되는 지옥의 땅으로 변했던 사실을 보면서 전쟁의 상처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붉은 벽돌로 허술하게 지어진 사호건물은 독가스실로, 죽어서 널브러진 시신들의 처참한 모습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때 죽음 앞에 몸부림치며 붙잡았던 벽돌벽의 손톱자국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소독과 샤워라는 미명하에 가지고온 짐을 놓아두고 발가벗겨 진채 독가스실로가 30분 안에 시신으로 변해가는 흔적의 사진.

무슨 죄가 있어 데리고 온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 한줌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는 아녀자의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믿어지기도 무척 힘이 들었다.

참살의 원흉이자 히틀러의 하수인인 게슈타포는 전쟁에 참패하자 몰래 도망가다 영국 비밀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있는 자기집무실 옆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자리에는 원혼들의 위령탑과 영혼을 담아 두는 그릇이 설치됐다.
매년 9월 14일이면 생존자들이 아우슈비츠 역에서 철길을 따라 수용소로 걸어 와서 원혼들의 넋 앞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게슈타포가 원혼들에게 사좌라도 하듯 죽으면서 ‘나도 유태인이 되고 싶다’고 남긴 묘한 유언이 궁금증을 자아냈다.

수용소 탐방객들이 낸 입장료는 관리비를 제외하고 대부분 생존자들의 복지를 위해 쓰인다.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망각하는 일본과 달리 독일정부는 그들의 과오를 백배사죄하며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복지를 위해 전쟁부담금을 100년 동안 보상하려고 노력 중이다.

현재까지 폴란드에만 바르샤바 도로 증설을 비롯한 2조원의 전쟁부담금을 지원했고, 독일 총리가 그 수용소에 가서 무릎 꿇고 사죄할 정도다.

그리고 독일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수용소 현장체험을 통한 역사공부를 배우고 있다.
신사참배를 고집하는 일본 고이즈미 전 총리를 비롯한 망언을 일삼는 일본인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점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자 아직도 종전이 아닌 휴전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상태에서 6·25전쟁의 골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온 세계가 비록 총칼을 앞세우지는 않았지만 경쟁전쟁, 문화전쟁, 정보전쟁 등으로 약육강식을 일삼는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우리나라가 살아갈 길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하루 빨리 남북통일을 이뤄 당당하게 세계열강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평통 자문회의 안보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자문위원들의 가슴에는 한반도의 통일이 누군가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이뤄야 할 당면과제라는 목표가 새롭게 각인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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