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과잉의 의식을 고쳐야 할 때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값있게 사는 것이냐는 문제는 인류문화사가 줄곧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오고 잇는 일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다라고 종교권, 문화권에 따라 다르고 또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고 종교권, 문화권에 따라 다르고 또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가치규정의 척도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다.

양심과 정의라는 것도 말은 같으면서 그 표현은 역시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 자기 양심의 소치라고 굳게 믿고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액운을 가져오는 수도 있고, 한 정치인이 한 시민의 정의의 부르짖음이란 것도, 다른 정치인이나 다른 시민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불의일 수가 있어서 양심과 정의를 내세울 때는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주를 이끌어갈 정치인들아!

그런 문맥에서 가장 조심을 요하는 것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요, 거기 따르는 정치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는 언제 어디서 행하여도 양심과 정의에 어긋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해가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는 일이 있는 법이다.

나주에 정치리드자들아!!

가령, 씨알을 대지에 뿌려 땀 흘려 거둬들인다거나 가축을 길러 사역(使役)하거나 남에게 영양을 공급 하는 일, 공장에서 생활에 쓰이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열중하는 일, 산천을 다스리는 관개사업, 사람과 물건을 생산지에서 소비하는 곳까지 날라다 주는 수송, 미를 추구하는 예술행위로 사람의 정서에 이바지 하는 일, 몽매한 사람들에게 사는 이치와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인술로서의 의료 등, 한없이 많은 일등은 시간과 공간을 포월 하여 나와 남,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이다.

 그런 견지에서 이제까지 인물중심, 사건위주로 기록해 온 역사를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개성이 구기력한 범상(凡常)속에 감동적인 것을 무감동속에 매몰시키거나 무산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인물이나 사건을 가치 짖는 척도와 인정하는 각도를 달리 하자는 것이다. 우리 나주시의 경우 그것은 정치의식의 과잉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뜻할는지 모른다.

왜 우리 시민이 정치에 대하여 그토록 민감한 자 하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계층 모든 분야의 시민들이 자기 본인의 직업이나 임무에 대해서보다 정치적인 것에 과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생활인으로서 반드시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일종의 병적 현상이 아닐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정치가 보다 나은 우리시민의 생활을 위하는 것일진대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찌 폭넓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정치적인 인간만이 주목의 대상이요, 정치적 사건만이 특기할 사회현상이랄 수 있겠는가.

정치인이 델런트처럼 지목되고, 사는 것이 쇼처럼 착각되는 정치의식 과잉의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경박한 인기만을 노리고 제멋에 겨워하는 정치인들이 날뛰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사회가 결코 그런 성황의 정치인들의 놀이터는 아니며, 이땅(나주)의 진정한 주인공은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말없는 나주시민의 대다수라는 자각에 투철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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