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팔아 다섯 남매 키우고 집도 장만 했죠”

목사고을시장 터줏대감 장원신발백화점 장명환·김영애 씨 부부

신혼의 단꿈 속에 연 신발가게 53년 세월 속에 추억의 메카로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5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5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문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오늘의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갖게 되는 것인가.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삶과 인생이야기를 통해 나주 민초들의 삶을 엮어 본다.<편집자 주>

삶과 문화의 터전 목사고을시장

▲목사고을시장 장원신발백화점 장명환·김영애 씨 부부
지난 14일 찾은 목사고을시장은 마침 장날을 맞아 입구에서부터 북적이고 있다.
제 철을 만나 산처럼 쌓인 마늘, 양파에서는 특유의 매콤한 향기 속에 단맛이 실려 있고, 탐스럽게 익은 청매실은 알뜰한 주부의 손길을 기다린다.

오랜 전통을 가진 목사고을시장 오일장은 내놓은 품목만큼이나 파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모두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 세상소식을 만나는 소통의 장소가 되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 2년째 문화관광형 시장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전통시장 활성화와 상인 역량강화를 위한 사업들이 다양하게 추진되면서 시장의 규모만큼이나 상인들의 표정도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시장광장에서는 때마침 ‘들썩들썩 토요문화장터’가 열려 축제장을 방불케 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춤과 노래, 연극공연을 보는 가족들, 친구들과 삼삼오오 찾아와 젊음을 만끽하는 청소년들, 그리고 무료한 일상을 모처럼 열린 장날 사람구경, 장터구경으로 달래는 어르신들...

잠시 공연장과 장터를 돌아보고 지인을 만나 장터카페 ‘마르셰’에서 냉커피 한 잔씩을 한 뒤 53년째 신발가게를 하고 있다는 장원신발백화점을 찾았다.

▲중종실록에 1470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나주장이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목사고을시장 터줏대감 장명환·김영애 부부

목사고을시장 상설동에 자리한 장원신발백화점에서는 신발가게 특유의 고무냄새가 났다. 진열된 품목이 고무신도 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아웃도어 신발, 신사용 구두, 주부들이 좋아하는 통굽 신발, 어르신들 편하게 신는 효도신발, 유아용 뽀로로신발... 다양하다.

취재를 왔다는 낯선 방문객을 점포주인 장명환(79·나주시 향교길)씨와 김영애(75)씨 부부가 반갑게 맞아 준다.

이들 부부가 결혼한 이듬해부터 이 신발가게를 운영했다고 하니 얼추 5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전북 부안 출신 총각 장명환 씨와 고창 출신 처녀 김영애 씨가 백년가약을 맺고 광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 되던 해에 나주로 내려와 이 신발가게를 인수했다고 한다.

당시 광주에서 신발도매 총판을 하던 합동고무신 직원이던 장 씨가 전 주인이 신발대금을 떼먹고 떠나버린 이 신발가게를 인수해 운영하게 됐던 것이다.

장 씨가 이 신발회사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 또한 예사롭지 않다. 군대를 막 제대한 뒤 딱히 할 일이 없던 장 씨는 합동고무신 사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나는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고, 어떻게 자라 왔으며,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 편지지 석 장에 빼곡하게 적어 보낸 서신이 사장의 마음을 움직여 취직이 된 것이다.

장 씨가 파는 신발은 당시 고무신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말표고무신이었다.

고무신의 추억 ‘말표고무신’

지금도 종종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잡히는 ‘검정고무신’이라는 만화영화를 곧잘 보는데, 1960~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40~50대 중년들에게는 추억을 새록새록 일깨워 주는 바로 그 검정고무신. 그 때를 회상하며 장명환 씨의 추억담도 빛을 발한다.

“우리집이 신발가게를 했어도 우리 애들에게 함부로 신발 못 신겼어요. 다른 아이들이랑 똑같은 검정고무신이었지.

그때 고무신은 신발 이상의 신발이었어. 도랑을 막아 물고기를 잡을 때 고무신으로 물을 펐고,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고무신 멀리 차기 놀이를 하고 놀았고, 고무신이 닳으면 엿장수 아저씨에게 뛰어가서 엿과 바꿔 먹기도 했으니까 신발도 되고, 장난감도 되고, 유일한 재화수단이기도 했던 거지.”

장 씨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모두 똑같은 검은색이 뒤섞일까 봐 새로 고무신을 사면 먼저 이름부터 써놔야 했던 기억,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할 때는 발에 땀이 차서 벗겨지니까 고무신을 냅다 들고 뛰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말 나온 김에 당시 신발시장을 주름잡았던 고무신 계보를 들어보았다.

“그 때 나왔던 고무신이 태화고무의 말표, 동양고무의 기차표, 국제화학의 왕자표, 보생고무 타이어표가 있었는데 그 신발메이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신발이 바로 말표고무신이었지.”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나라에 고무신이 처음 보급된 때는 1910년대 말이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고무신은 부드럽고 질기며, 비가 와도 신을 수 있기에 짚신 미투리를 신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나이키’ ‘아디다스’ 이상이었던 것.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는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외출할 때 신었던 말표 하얀 고무신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싶었고, 더 욕심을 내자면 하얀 운동화를 신고 싶었던 욕망에 밤새 공부에 매달려 반에서 1등을 했다며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추억도 떠오른다.

이후 고무신은 진화를 거듭해서 합성고무에 천을 입혀 만든 학생 운동화가 불티나게 팔렸고, 가볍고 편한 합성피혁 신발인 케미컬 슈즈도 주름잡던 시기가 있었다고.

5남매 반듯하게 키워 온 평생기업

장 씨 부부가 광주 양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큰아들을 낳은 지 딱 일주일만에 나주에 내려오면서 리어커 짐꿈에게 실려 보낸 살림살이는 밥상, 단스(옷장), 이불, 솥단지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눈이 어찌나 많이 내리던지 갓난애를 안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짐은 리어카꾼에게 맡겨 실어왔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금계동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장 씨 부부는 나주장과 영산포장, 남평장, 노안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하루는 물건을 하러 광주로, 서울로 돌아다녀야 했으니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쉼 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고무신 장사가 잘 되던 때라 고생이 고생스럽지 않았고, 다섯 남매가 서로 우애하며 어엿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보람이 컸다고 한다.

장 씨 자신이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집안의 도움 없이 결혼을 하면서 몸만 빠져나온 상태라 맨손으로 세상과 대적해 살아 왔다고 전하는 말 끝에 한탄과 힘겨움이 느껴진다.

“젊을 때가 좋았지”

스물여섯 창창한 나이에 시작한 신발가게가 지금은 노후를 지탱해 주는 두 부부의 가업이 되고 있다.

한창 때는 미처 돈을 셀 틈도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하루 한 두 켤레 파는 것이 고작이고, 장날은 열 켤레 남짓, 대목이 돼야 스무 켤레 정도가 팔리는 실정이다.

하지만 점포 삯이 한 달에 4만원으로 부담이 되지 않고, 외상으로 물건을 떼는 법이 없어 빚이 없으니 마음은 편하다는 장 씨 부부.

“가장 좋았던 시절은 우리가 젊었을 때, 신발을 사러 오는 사람들 치고 얼굴색이 나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만나는 손님들이 다들 즐겁고 기쁘니 우리가 파는 신발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 같아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 거지. 그것으로 만족해 우리는.”

나주 서민들의 정취 물씬 ‘목사고을시장’

나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해 53년 동안 장터를 지키며 살아 온 장명환 씨와 김영애 씨 부부. 이들 부부의 소박하면서도 알찬 인생 얘기를 듣고 나오는 길에 구수한 젓갈냄새에 이끌려 반찬가게로 향한다.

가끔 여러 날 집을 비워야하는 출장길이 걱정될 때 장바구니를 들고 목사고을시장에 들어서면, 콩자반이며, 새콤한 마늘쫑 장아찌, 금방 버무려 놓은 배추김치, 열무김치까지... 출장길 가족들에 대한 고민과 미안한 마음을 안도의 한숨으로 바꾸어 놓는다.

목사고을시장은 예전에 비해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한 가지는 인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계산보다 사람을 앞에 두는 목사고을시장 상인들이다.

닷새에 한 번 4일과 9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시민들이 많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전남타임스 후원

저작권자 © 전남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