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촌년이 전라도 총각한테 손목 한번 잡힌 죄로 출세해부렀제, 하하핫!”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몸은 고달파도 독서와 글쓰기로 마음의 여유 다져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5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5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문이었다는 것.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오늘의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대중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나주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소탈하고 가식 없는 웃음 속에 26년째 나주장을 지켜 온 유복순·강연남 씨 부부
장똘뱅이 아줌마 과거를 물었더니

“안녕하세요? 여기가 사장님이 글도 잘 쓰고 직접 재배한 야채를 판다는 가게 맞나요?”

나주장이 서는 지난 19일, 수소문 끝에 찾은 목사고을시장 야채가게 아줌마 유복순(51)씨는 ‘바쁜데 웬 잡상인이냐?’ 하는 표정으로 기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때마침 지난호에 나갔던 장원신발백화점 장명환·김영애 씨 부부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여주며 인터뷰를 청하자 당치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나 같은 장돌뱅이 아줌마한테 뭔 취재를 할 것이 있다고 그라요? 사람 잘못 찾아온 것 같은디?”
전라도 장터아줌마 특유의 걸걸하면서도 투박한 음성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표정과 눈매, 말씨가 전라도 토박이는 아닌 듯했다.

“연세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20년 넘게 야채장사를 하셨다면서요? 직접 농사도 지으시면서...”

여자는 과거에 약하다 했던가? 지나간 과거얘기를 슬쩍 들추자 금방 표정이 진지해지며 목소리가 나지막해지는 유복순 씨. 그녀의 얘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젖먹이 둘째아들 등에 업고 시작한 야채장사”

26년 전, 젖먹이 둘째아들을 업고 나와 나주병원 옆 난장에서 야채 좌판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나주장과 인연을 맺었다니, 그녀의 표정 속에 그 세월이 역력했다.

“애기를 없고 장사를 하다 보면 애기도 힘들도 나도 지치고, 그러다 애기가 칭얼대면 아직 젊을 때라 함부로 젖을 먹을 수도 없어 한쪽으로 틀고 남 안 볼 때 젖을 물리곤 했제.

▲“싱싱한 야채 팝니다. 건강과 인정을 덤으로 얹어드립니다!”  

그렇게 배곯고 자란 아들이 1m90이 넘는 장정이 될 줄 누가 알았겄소?”

그때는 나주장 뿐만 아니라 전국 아파트단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터라 막둥이가 들어 선지도 모르고 다녔을 정도라 한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단골이 되고, 언니 동생이 되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의지를 하는 피붙이 이상의 인연으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장사를 하다보면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기분이 나빠서 장에 나온 사람은 시금치 꼬투리가 말라있는 것 갖고도 시비를 걸고, 왠지 어깨가 쳐져 있는 사람에게 안 됐다 싶어서 콩나물 한 움큼 더 집어주게 되면 그 다음 장날 활짝 핀 얼굴로 다시 만나게 되고, 저는 매번 장날 만나는 사람들이 내 인생에 길동무이자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만나요.”

“농부의 새벽잠은 고객을 위해서 양보해야”

고객들과의 만남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며 늘 최선을 다 하는 유복순 씨에게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가볍지 않다.

나주시 남평읍 광이리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는 유 씨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밭으로 향한다.

초보농사꾼일 때는 아침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아침상을 물린 뒤에야 밭으로 향했는데, 그렇게 거둬들인 야채는 한낮이 지나기 무섭게 시들어 버려 오후장이 되면 내놓을 면목이 안 선다는 것.

하지만 새벽이슬을 맞으며 야채를 수확할 때면 이튿날 해름참이 되도록 싱싱함이 유지돼 마지막 떨이로 내놓을 때까지 손님들에게 미안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 농사의 진리를 아는 지라 이제는 새벽잠이 아쉽지 않은 전문 농사꾼이 다 됐다.

유 씨가 직접 재배하지 않은 야채는 광주공판장에서 물건을 받아 온다.
이른 새벽 광주공판장을 다녀오는 길에 그녀의 문학적 감성을 작렬한다.

채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가는 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이 돌아오는 길에 봄 햇살이 길을 밝혀주면서 차창 너머로 어렴풋이 분홍빛 진달래가 보이기 시작한 것.

눈을 크게 뜨고 창문을 열어 산기슭에 숨은 진달래, 개나리를 찾는 일상이 “바빠요, 시간 없어요”를 입에 달고 살던 그녀에게 긴장을 풀어주는 활력이 되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세월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신리와 믿음으로 일군 20년지기 단골손님

갓 쉰을 넘긴 중년의 여인답지 않게 당찬 말투와 또릿한 얼굴선을 가진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고향이 어디냐, 남편을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 나주는 어떻게 내려오게 됐냐...

이어지는 질문 속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온 손님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져 대화는 몇 번씩 끊어졌다.
유독 아저씨 손님들이 많아서 물어보았다.

▲나주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찾아 목사고을시장을 찾은 나주상고 학생들
“다른 야채가게도 많은데 왜 여기서 사세요?”

“여그 사장님이 이쁜께. 싸고...” 

“우리 마누라가 여기 것이 좋다고 꼭 여기서 사오라 안 하요.”

가끔은 손님들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유복순 씨.

“아따, 아재, 시금치가 겨울에는 통통한 게 맛있어도 여름에는 짧은 것이 부드럽고 맛나단 말이요.”

결국 그 남자손님은 길쭉하고 여리여리한 시금치가 아닌 짧달막한 시금치 한 보따리를 들고 떠났다.

26년 동안 장사를 해오면서 오직 ‘신뢰’와 ‘믿음’이 자본이었다는 유복순 씨. 오늘 온 손님이 다음 장날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맞이하는 것이 20년지기 고객을 만드는 비결이라고 한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한창 바쁜 중에 기자와 수다가 길어진 부인을 채근하기는커녕 앞뒤로 오가며 수레에 짐을 실어나르며 손님을 받던 남편 강연남(56)씨.

부부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몇 번 요청을 했지만 못내 어색해 하는 표정 때문에 따로 몰래 찍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본토백이 아가씨였던 유복순 씨는 외항선을 타던 남편과 펜팔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던 사귐이 이어지면서 한번 만나게 되면 오전 10시에 만나 오후 4시에 헤어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는 부부.

그렇게 이어진 인연으로 결국 생면부지의 땅 전라도 나주 땅을 밟게 됐다는 유 씨.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농사를 짓는 시부모와 3남4녀의 맏며느리라는 자리였다.

처음엔 어설픈 농부의 아내로 시작한 삶이지만 산전, 수전, 공중회전까지 다 겪으면서 얻은 삶이 바로 지금의 건강한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양심농사꾼, 나주장과 영산포장을 주름 잡는 야채가게 여사장,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는 전의경어머니회 총무, 나주목사고을시장 상인대학 고문, 학부모회장, 그러면서 자기계발을 위해 늦은 밤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불을 밝히는 감성의 소유자다.

20년 넘게 장사, 살림, 농사, 세 아들, 시부모, 시아제까지 함께 살며 취미생활 한 번 못해보고 살아 온 그녀에게 사람들은 ‘일만하는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2008년부터 나주공공도서관 평생교육원에서 운영하는 문예창작반과 이화독서회 회원으로 활동해 오며 유 씨는 생전 처음으로 글쓰기 공부를 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이제는 취미이자 유일한 삶의 여유가 되고, 쉬는 날이면 습관처럼 서점에 들러 책을 만지작거리며 책 속의 보물찾기를 하게 됐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그녀의 글이 실린 문집들을 찾아 읽어보니 대체나, 그녀의 글은 고상한 표현이 아니면서도 삶의 기쁨과 감동, 생활의 생동감이 뚝뚝 묻어나는 살아 숨쉬는 글들이었다.

사람 사는 모습 찾아 목사고을시장으로

낡고 오래된 재래시장 특유의 헌 옷을 벗고 깔끔하고 세련된 현대시장으로 탈바꿈한 목사고을시장. 어느덧 나주사람들만의 장터가 아닌 전국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나주목사고을시장은 시설현대화사업에 의해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통합 이설한 최초의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이같은 성과는 2012년도 전국우수시장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했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 2년 연속 정부에서 주관하는 문화관광형시장으로 선정돼 예술과 문화와 경제가 함께 하는 삶과 문화예술의 시장으로 거듭 진화하고 있다.

그런 시장의 모습을 찾아 나주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카메라를 들고 시장나들이를 나선 모습은 어쩌면 나주의 가장 생동하는 삶을 보여주는 현장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 김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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