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숙
시인·비단송 회장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멜론을 깎는다.

표피에 밧줄로 엮은 듯한 돋을무늬가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부드러운 속살이었을 표피를, 몇 천 가닥의 실을 꼬아 만든 밧줄로 엮어 두꺼운 껍질로 덮었을 것이다.

그 촘촘함이라니.......땅에 떨어져도 와장창 깨지지 않도록 그토록 촘촘히 엮었으리라.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최초의 멜론의 어미는 수 만년의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듯 명줄들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면 눈물로 짠 사랑의 옷감처럼 아름답지 않은 명줄이 없다.
박물관에 간다. 박물관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쌓여있는 역사책이다.

새의 날갯짓이나 물고기의 아가미호흡이나 인간의 직립보행은 다 까닭이 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의 천지창조처럼 태초에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더라도 피조물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환경에 적응해왔다.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본다.

소낙비 쏟아지는 나뭇가지에 앉아 새끼를 안고 떨고 있는 원숭이가 애처롭다. 니체는 자신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에서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무서운 깊이를 가진 인류의 후손이어서 지금 행복하다.
눈과 바람과 비를 가려주는 집과 따뜻하고 시원하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한 옷과 맛있는 음식들, 도덕과 철학과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예술들.......

이렇게 아름답고 오묘한 사이버세상까지 넘나들며 풍요를 즐기기까지, 저 헐벗은 원숭이와 다름없던 수십만 년 전의 인류의 최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높고 높은 눈물탑을 쌓아왔는지, 그 높이에 이르기까지 터파기와 그 기소는 또 얼마나 깊고 단단했는지, 박물관을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의 눈으로 꿰뚫어보리라. 그 눈물겨운 시간을 함께 되걸어보리라.

그리고 그 고단함을 꼭 안아주리라.

박물관으로 가는 길

국립 나주박물관은 나주시내를 에돌아 영산포 복판을 건너, 영암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안내표지가 나온다. 수천 년 동안 마한을 지킨 반남고분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고분군은 자미산을 중심으로 고분 4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주위는 온통 농경지여서 사방이 툭 트여 있다. 박물관 현관 오른편으로 작은 오름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박물관 옥상에 이른다.

옥상에는 각종 꽃이 심어져있다.

꽃을 배경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노라면 영혼의 시야가 마한의 하늘까지 닿는다.
둘러보면 고분군들이 우리를 압도한다.

저 고분의 주인들도 이천여년 전에 우리처럼 이 길을 걸으며 웃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농사도 짓고 과일도 따먹으며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만하면 박물관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 이제 우리의 뿌리를 더듬어보기로 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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