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경자 씨 “할머니, 어머니 뒤이어 오빠, 조카, 딸까지 4대가 곰탕으로 먹고 살제”&1910년 배고픈 장꾼들이 즐기던 나주곰탕, 나주장의 전통 이어가는 대표 먹거리로

▲어렵던 시절 춥고 배고픈 설움을 달래기 위해서 먹었던 나주곰탕, 길경자 할머니는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 한 명을 위해 새벽부터 곰탕을 끓여오고 있다.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문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2년 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오늘의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대중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나주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시인도 울게 한 ‘나주곰탕’ 시인 정철훈 씨는 나주곰탕을 먹으며 이런 시를 지어냈다.

‘석유내 이는 정제에서 아낙은 /마늘을 다지고 쪽파가 눈이 매웠습니다 /시집간 딸처럼 매웠습니다 ... 모든 울음이 가마솥에서 설설 끓고 /곰탕 같은 국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곰탕 국물에 소금을 타고 파를 넣으면 /그게 바로 우리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까’ <정철훈 시 ‘나주곰탕’에서>

한 때는 춥고 배고픈 설움을 달래기 위해서 즐겨먹었던 나주곰탕, 이제는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고향의

▲나주목사고을시장 식당동에 자리 잡은 길가네나주곰탕은 나주곰탕의 참맛을 맛볼 수 있는 모녀4대 곰탕집이다.
맛을 느끼기 위해, 건강을 위해, 진정한 식도락을 위해 나주곰탕을 찾고 있다.

그런 진정한 나주곰탕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다.

바로 나주 목사고을시장 식당동 중앙에 자리한 ‘길가네나주곰탕’. 장날이 아닌데도 식당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고, 주인 길경자(68)할머니는 부지런히 곰탕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아뿔사! 주인 할머니가 팔에 보호대를 차고 있는 게 아닌가? “할머니, 곰탕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팔이 불편하신 거여요?” “그라믄 좋제, 7월 장마통에 미끄러져서 팔이 어긋나 부렀네. 수술하고 지금은 견딜만 해.”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차분히 붙잡고 얘기를 들어 볼 틈이 없어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할머니의 곰탕집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잘 나가던 곰탕집 막내딸 길경자 씨 길경자 할머니는 어머니 임이순 씨로부터 곰탕을 배웠다.

어머니 임이순 씨는 시어머니 원판례 씨에게 곰탕을 전수받았다. 딱이 기술이랄 것이 없으니 전수받았다는 말보다는 집안일을 거들어주다 대물림을 한 경우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10년 즈음 나주 오일장에서 ‘육문식당’을 운영하던 할머니 원판례 씨가 백반집을 운영하다가 도축장에서 나오는 소 내장과 뼈, 잡고기 등을 삶아 밥을 말아 팔았던 것이 곰탕의 시초가 됐다고 전한다.

그 뒤를 어머니 임이순 씨가 이었고, 어머니를 도와 잔심부름을 하던 셋째아들 길한수 씨와 막내딸 길경자 씨가 솜씨를 이어 받아 각각 하얀집과 길가게나주곰탕을 운영하게 됐다.

여기에 길경자 씨의 딸 김윤경 씨가 광주 상무지구에서 또 다른 길가네나주곰탕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모녀4대’가 나주곰탕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나주곰탕의 참맛을 전수해 준 길경자 씨의 어머니 고(故) 임이순 여사
그 세월이 자그마치 104년이다.

나주곰탕의 비결은 좋은 재료와 정성 곰탕은 전국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고 나주에도 여러 곰탕집들이 있지만 나주곰탕을 으뜸으로 치는 건 나주사람들만의 견해는 아닐 듯 싶다.

일반적으로 나주곰탕은 가마솥에 한우사골을 넣고 그 위에 머릿고기나 양지머리, 아롱사태, 꼬리 등을 쌓아올려 푹 끓인다.

그러면서 계속 기름을 걷어내기 때문에 국물이 맑고 진하다.

길경자 할머니는 고기 고유의 깊은 맛을 내기 위해 고기를 삶을 때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이 나주곰탕 특유의 맛을 내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또한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완전히 뺀 뒤 고기에 붙은 기름기도 정성껏 떼어내야 군더더기 맛이 사라진다고.

새벽부터 고기를 끓이기 시작해 3시간 정도 센 불에서 푹 끓이다 기름기를 걷어낸 뒤 다시 고고, 고기를 꼬치로 찔러보아 익었으면 건져내어 결 반대방향으로 썰어 다시 국물에 넣는다.

이런 과정을 옆에서 지켜서서 직접 하지 않으면 그 날 장사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길 할머니가 터득한 장사비법이다.

곰탕의 느끼한 맛을 가시게 해주는 것은 적당히 익은 김치와 깍두기. 너무 익지도, 덜 익지도 않은 상태로 곰탕과 찰떡궁합을 이루게 하기 위해 길 할머니는 오일장이 설 때마다 직접 장을 봐서 김치, 깍두기를 담그는 일이 또 한 살림이다.

서민음식에서 고향의 맛 별미로 한창 손님이 밀려드는 저녁시간, 주방에서는 뚝배기에 밥을 넣고 바로 곰탕국물과 건더기를 담아 손님에게 내도되련만 자꾸 밥에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시간을 끈다.

바로 토렴을 하는 과정이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길경자 할머니는 “곰탕을 내기 전에 토렴을 잘해야 제 맛이 난다”면서 “미지근한 밥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해서 따뜻하게 만들어 내야 식사를 마칠 때까지 국물이 식지 않고 가장 맛있다”고 귀띔해 준다.

인천에서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러 왔다가 가족들과 함께 곰탕을 먹으로 왔다는 정태민(53)씨 가족.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내미가 곰탕을 한 잎 가득 입에 떠 넣더니 우물거리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인천에서 먹던 곰탕이랑은 맛이 다르지?”라며 깍두기를 수저에 얹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상한 나주사람의 인심이 느껴진다.

시내 곰탕집들은 이미 곰탕가격을 8천원으로 올린 지 오래지만 길가네나주곰탕만큼은 가장 서민적인 가격 7천원을 고수하고 있다.

“고깃값이 많이 올라서 우리도 가격을 올려야 수지타산이 맞는디, 여기가 시장이라서 못 올리고 있제. 이 분들 하루 종일 앉아서 장사하고 시장기 때우러 우리집 오는디 천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잖어.” 장터에서 수십 년을 함께 해 온 동료 장꾼들에 대한 배려와 인심이 그대로 묻어있지 않은가.

비록 큰 규모의 식당은 아니지만 나주의 본토에서 가장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을 위해 오늘도 곰탕을 끓인다는 길경자 할머니.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목사고을시장에서 나주의 참맛을 맛보고 넉넉한 인정을 나누는 대한민국 최고의 시장으로 발돋음하기를 힘껏 응원한다고 했다. /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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