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제2지대 oss부대 함성과 절규를 듣다

 ▲김노금
/나주시의원·민주평통 자문위원
<둘째날>화산~중국 오악 중 하나

이미 차 안에서 지각생에게는 얼마간의 지각비를 물리자고들 약속을 했었던 터라 헐레벌떡 달려온 000 의원이 에누리 없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넉살좋은 000 의원께서 이대로는 본전이 생각나 너무 억울해서 그냥 못 들어간다며 얼마나 또 사람 좋은 익살을 떠시는지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 에구구 사람 죽네~” “에고~ 이 ~~웬수~~” 하면서 자지러지며 웃고 떠드는 소리에 아연 버스 분위기에 활기가 돌았다.

얼굴에, 가슴에 그 큰 몸으로 육탄공세를 하는데도 누구하나 그리 싫지 않은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의 딸을 몇 년간 돌보며 보육했던 오래전의 세월 속에서도 늘 어려울 뿐인 분이었다.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인 지역민들과의 친화력이 참으로 대단한 분이라 생각되었다.

이십년 넘은 세월을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늘 데면데면 겨우 인색한 눈인사 정도로 그쳤었는데 연수의 목적인 평화통일 역량강화위에 시민과의 화합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중국이 막 개방을 하고 난 이듬해 중국 연변대 조선족 작가들의 초청으로 95년 중국 방문부터 중국에 사는 조선족 후세 어린이들의 우리말 교육을 위해 여러 번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의 중국행은 그다지 일반화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시 죽의장막이라는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히 컸는데 중국기행문을 부탁하는 김양순 국장의 요청으로 나주의 지역신문에 몇 차례 기고한 적이 있었다.

처음 중국 방문 당시의 북경 비행장의 작고 초라한 풍경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때마다 무섭게 변하는 중국의 모습은 큰 놀라움을 넘어 때론 전율이었고 때론 큰 두려움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중국의 표정은 오래된 도시이기는 했으나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쫙 편 표정은 자신감에 당당했고 늘 냄새에 쩔어 있는 것 같던 꾀죄죄한 그들의 옷차림은 우리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밝고 화려 했었다.

광복군 제2지대와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화산이라는 곳은 중국의 오악중 하나이기는 하나 새벽에 일출을 볼 수 있는 산으로도 유명한 곳이어서인지 거기 또 한 수많은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네의 명승지처럼 크고 작은 가게에서 조잡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고 옥수수니 고구마 등을 쪄서 팔고 있었는데 그 맛은 우리 것 보다는 별로였던 것 같다.

아스라한 산봉우리까지 케이블카로 이동하여 오갔는데 어디서고 넘쳐나는 중국인들을 보면서 돈이 없어 관광은 꿈도 꾸지 못한다던 예전과 달리 이런 상황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힘과 용트림에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한일관계가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얽혀 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상황에서지금 현제 중국과 일본의 상황은 예전보다 많이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는 일본과의 접촉 자체를 꺼리던 중국이 아니었던가?

중, 일간에는 영토분쟁과 역사인식 등의 많은 난제가 가로놓여 있지만 양자회담을 위한 조정작업이 꽤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감지하게 되는 요즘이다.

중·일화해가 가시화하고 북, 일 접근이 속도를 내면 우리는 동북아에서 어쩌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만의 생각이고 염려일까?

어쨌든 정세에 밀려 쫓기듯 주변국과의 관개개선에 나서면 명분도 실리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정부 당국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나 어쩐지 요즘의 상황은 조금은 허둥대는 우리의 모습으로 비쳐져 안타까운 마음인 것이다.

광복군 제2지대 oss 훈련장(두곡)방문

광복군 제2지대는 1942년 4월 초기에 편성되었던 제1지대와 제2지대 제5지대를 통합하여 새로이 편성되었다고 한다.

참모장은 광복군으로서 우리 귀에 꽤 익은 이범석 장군이었다.

제2지대는 서안을 거점으로 화북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광복군의 주력부대가 되었고 그들의 목숨 바친 항일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잠시 숙연한 마음에 몸가짐을 새로이 해야 했다.

1945년 4월 군무부의 보고에 의하면 제 2지대는 장교 28명, 대원 122명, 사병 35명등 185명이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그 무시무시한 일제의 침략만행에 맞서 싸워 결국은 그해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게 하기까지의 광복군의 역사는 한마디로 피로 이룬 개가가 아닌가 싶다.

광복군 제2지대 oss 부대가 또 한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1945년 5월부터 미국의 전략 첩보기구인 oss와 연계하여 oss 정보훈련을 받고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하였던 부분에 있다.

제2지대 본부가 있던 곳은 아쉽게도 보존되지 못하고 현재는 곡식을 모아두는 창고인 두곡 양참이 들어서 있었다.

옛 건물이 모두 헐린 터를 보면서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의 민족혼이 보존되지 못하고 헐린 것을 누굴 탓할까?

그러나 그때의 광복군이 불렀던 노래는 아직 구전으로 남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기 이해평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하여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이역만리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광복군 사이에 널리 불렸던 ‘광복군 제2지대가’를 소개한다.

‘총 어깨 메고/피 가슴에 뛴다/우리는 큰 뜻 품은/한국의 혁명 청년들/민족의 자유를 쟁취하려 원수 왜놈 때부시려/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한국광복군 제2지대/앞으로 끝까지 전진/앞으로 끝까지 전진/조국독립을 위하여/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당시의 젊은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일제의 총 칼 앞에 피어린 저항한 것이다.

오직 내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꽃처럼 스러져간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모두들 다시 한 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넘치는 풍요와 자유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과 일제36년의 탄압은 물론 위안부 문제 등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아직도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주변국을 위협하는 이 때, 광복군들의 의기가 살아있는 이 곳 광복군 제2지대의 방문은 우리 모든 평통위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중국과 북한의 군사위협을 빌미로 꾸준히 방위예산을 늘리고 있는 일본이 내년 방위예산 또한 증액 할 것이라고 한다.

3년 연속 증액이다.

일본은 또 센카쿠열도(중국명~다오위다오) 를 비롯한 낙도에 대한 방위력 강화를 예산 증액의 이유로 꼽고 있다.

거기에 독도 문제에 대한 교재도 독자적으로 제작해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수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니 이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대응책이 참으로 절실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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