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핀 별을 닮은 꽃

▲김진수 회장/ 전남들꽃연구회
학명: Aster sphathulifolius Maxim.

쌍떡잎식물강 국화목 국화과 참취속의 여러해살이풀

 

 

꼬투리를 털고/안을 피워/物의 설레임을/바라보는 것/얼마나 좋으냐/수평선 도저한/그대/은적한 사랑…졸시 「해국」

가을꽃이라고는 하나 한여름부터 시작하여 따뜻한 곳에서는 12월까지도 꽃을 피우는 해국은 낮은 키(30~40cm)로 깎아지른 절벽 바위틈에 의지해 일 년의 반가량을 꽃으로 산다.

오래 피기로는 백일홍이나 배롱나무 같고, 아무 데서나 잘 자라기를 천문동이나 갯기름나물과 같이 하며, 도톰한 잎에 부드러운 털로 번행초처럼 거친 해풍을 잘 이겨낸다. 이것의 윗부분은 푸른 상태로 겨울에도 남아있어 반목본성 초본 식물로 보기도 한다. 풀이면서 나무의 성질을 지닌 억센 식물인 셈.

흐린 녹색 잎의 추억과 연보랏빛 꽃의 그리움이 바위너설의 뾰족한 외로움과 잘 어울리는 가을바다다운 꽃이렷다. 우리나라엔 종종 흰 꽃이 피는 ‘흰해국’과 함께 해국에 비해 체형이 큰 ‘왕해국’이 자란다.

▲해국은 키도 아담하고 꽃빛도 곱고 개화기도 아주 길어 집에서 기르는 화초로서도 모자란 데가 없다.

『해국』은 이름 그대로 ‘바닷가에 피는 국화’이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조수와 가이없는 수평선, 그 긴 고요에 맞선 벼랑 끝에서 해국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의미 있는 여러 꽃말들을 얻었다.

꽃빛을 보고 묻는다면 ‘밝고 고상함’이 옳고, 생태를 보았다면 ‘기다림’이나 ‘인고의 세월’같은 시적 수사가 제격일 터. 그렇다면 ‘침묵’은 곧 아스라한 높이, 그 초월의 자태에 합당하다. 

종소명 ‘sphathulifolius’는 주걱모양의 잎을 의미하고, 학명 Aster는 ‘star’로 ‘별을 닮은 꽃’이란 뜻이다.
해국은 키도 아담하고 꽃빛도 곱고 개화기도 아주 길어 집에서 기르는 화초로서도 모자란 데가 없다.

더욱이 강인한 생명력은 어디서도 기죽지 않고 잘 자라주어 예의 소금기 맛의 바다가 도심의 정원에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특히 유성이 흐르는 바다에 인접한 공터나 빈 언덕을 넓게 자리 잡는다면, 파란 바다를 바닥에 깔고 쪽빛 가을하늘을 위로 떠받든 보랏빛 주단의 장관이 필자의 눈엔 동화처럼 그려진다.

추위에 견디는 힘이 조금 약하여 겨울에 보온관리를 잘하면 어디서고 재배가 쉽다.

종자번식의 경우 첫해에는 꽃 없이 적당한 크기로 자라지만 이듬해부터는 크게 자라 아리따운 꽃을 피운다.

뭍의 욕망에서 벗어나 술렁임과 소음과 번다함을 내려놓고 홀로 해안사구에 서 보라.

드넓은 바다를 향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손사래와 수평선 끝을 한 마장 돌아 나와 물밀 듯 가슴을 치는 회한의 깊은 발자국들이 백사장처럼 남을 터. 해국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다가와 음유와 사유의 여운을 남겨주는 꽃이라 말하고 싶다.

마음의 꼬투리를 털고 가만히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면 지난 사슬과 멍에의 못난 뱃고동이 울고 못 생긴 배회와 은적한 사랑의 갈매기가 난다.

이 꽃이 앉은 자리는 평생 그러했다. 그럼에도 마치 하안거 결재의 진자리에서, 동안거 해재의 마른자리까지 도합 반년 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누가 말린 것도 아닌데 하필 난바다의 벼랑인가? 왜 하필 외딴 세상의 돌밭인가? 물과 뭍의 경계에 돌아온 사람은 누구나 해국을 닮아야 한다.

▲한여름부터 시작하여 12월까지도 꽃을 피우는 해국

정녕 꽃으로 살고 싶다면 해국으로 하면 된다.

고독은 존재의 벗,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내면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내달리고 부딪고 으깨지는 파도의 음성을 귀가 닳게 들어야 한다.

저 멀리 아득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수평선의 시선을 짓무르도록 눈에 담아야 한다. 비록 몸은 사막일지라도 입술만은 서늘히 푸른 별을 노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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