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재료, 착한 가격, 착한 주방장이 만드는데 뭘 더 바랍니까?”

▲주말과 휴일이면 부부가 함께 죽을 끓여낸다. 부인 이미경 씨의 김치솜씨는 집안의 내력이다.옆은 남편 박영민 사장.

 

 

 

 

 

 

 

 

 

 

 

 

 

 

환갑 바라보는 나이에 도전한 팥죽장사 “전통 없어도 오직 정직한 맛으로 승부!”

목사고을시장상인회 수석부회장으로서 앉으나 서나 나주장 활성화 궁리가 취미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지난 2012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들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시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목사고을시장의 별미 단팥죽 한 그릇!

70년 후반 무렵,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마땅히 볼 것도 없고 먹을거리도 없었지만, 나주장에 오면 먹을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았다.

4일과 9일, 나주장이 서는 날이며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장에서 젓갈장사를 하는 엄마를 둔 친구들 꼬드겨 장구경에 나서곤 했다. 친구들과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물건들을 구경하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아는 친척, 동네 어른들을 만나서 갱엿이나 사탕을 얻어먹기도 했다.

지난 주말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저녁반찬거리나 살까 하고 찾은 목사고을시장은 한가하고 조용했다. 반찬가게 주인장은 담양에서 열리는 남도음식문화대축제에 갔다며 앞집 가게 아줌마에게 장사를 맡기고 간 모양이다.

시장기가 돈 것은 아니지만 마침 주인장 내외의 금슬이 좋아 보이는 팥죽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늦은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단 두 명뿐이었고, 마침 손을 놓고 있는 주인장 내외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팥꽃단팥죽 상호는 어떻게 지은 거예요?”
“재작년에 가게를 내면서 식구들에게 공모를 했죠. 거금 5만원을 걸고...조카가 당첨이 됐어요. 발음하기는 좀 어렵지만 팥꽃이 피는 들판을 생각해보면 왠지 팥죽이 맛있을 것 같지 않나요?”

박영민 사장(61·남평읍 팔마아파트)의 부인 이미경(51)씨의 설명이다.
“팥죽집을 하신지는 오래 되셨어요?”
“아뇨, 재작년에 목사고을시장이 들어서면서 입점공모에 당첨된 뒤 우리 부부와 처제가 함께 처음으로 시작한 겁니다. 장에 오면 대부분 전통이 오래된 맛집을 찾게 되는데 우리집은 갓 끓여낸 신선한 맛으로 승부합니다.”
박영민 사장의 대답이다.

“그런데도 팥꽃단팥죽이 꽤 유명하던데요? 이 집 칼국수며 팥죽 맛있다고 시내에 소문이 자자해요. 비결이 뭔가요?”
“비결이라야 뭐 있겠습니까? 일단 재료가 착합니다. 팥, 들깨, 참기름, 반찬재료 모든 재료를 국산으로 사용하고요, 가격이 또 착합니다. 5천원, 6천원이면 배부르게 한 끼 식사 뚝딱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호호...주방장님이 미남이신 것도 한 몫 하겠지요?”
“하하...미남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 것 보다 착한 주방장인 것은 맞습니다.”

콩나물은 사장님이, 김치는 아내 몫

팥죽 끓이는 남자 박영민 사장의 본래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였다.
광주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다 퇴직을 한 뒤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중에 목사고을시장 입점을 계획하게 됐다.

처음에는 음식솜씨 좋기로 소문난 아내와 처제가 주방을 맡았고, 어느 정도 솜씨가 익을 무렵 아내 이미경 씨는 본업인 나주 송월부영아파트 내 가정어린이집 햇살어린이집 원장으로 돌아갔다.

이후 모든 주방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박영민 사장은 바지락칼국수, 들깨칼국수, 동짓죽, 단팥죽과 함께 콩나물 무침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있다.

다만, 김치는 여전히 난공불락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아내가 나와서 김치를 담가주고 있다.
“김치까지 소화해 내야 완벽한 팥죽집사장이 되는 건데...”
아쉬움을 나타내는 박영민 사장의 어깨너머로 이미경 씨의 미소가 빛난다.

목사고을시장 먹을거리 다양해져야

현재 목사고을시장상인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영민 사장은 오일장과 함께 매일시장기능이 더욱 활성화 되려면 먹을거리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나 손님이 목사고을시장을 찾았을 때 구수하고 새콤달콤하고, 입맛이 당기는 요깃거리가 있어야 손님들이 자주 오게 되고 입소문을 타게 된다는 것.

“오일장이 서는 날은 주막도 생기고, 튀김집, 대포집에서 막걸리 한 잔이라도 하는 손님들이 많은데 평일은 그런 먹을거리가 없으니까 시장이 조용해요. 저녁시간에 시장 광장뿐만 아니라 도로변 쪽으로 먹을거리 포장마차가 주욱 늘어선다면 오가는 손님들을 불러 모으는 장사가 되지 않겠어요?”

과거에는 물산의 중심역할로서 나주장의 명성을 날렸다면 지금은 생활과 문화와 관광의 코스로서 시장이 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영산강을 타고 자전거 하이킹족들이 늘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이 나주시내에 들러 눈요기와 함께 먹을거리 쇼핑을 하고 갈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의 약장수, 지금은 문화공연            

그 옛날,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약장수들이 나주장에 와서 공연하는 날은 구경꾼들로 배로 북적거렸다. 예쁘게 분장을 한 춘향이가 무대 위 형틀에 묶여서 구슬프게 연기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이몽룡이 춘향이를 구출하기 위해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쳐댈 때는 신명이 절로 나곤 했다.

한바탕 공연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는 예쁘게 분장을 한 여배우들이 죽 둘러선 구경꾼들 사이를 오가면서 약을 팔곤 하였다. 그 당시 약장수들이 약을 팔 때 곧잘 쓰던 단골 레퍼토리가 있었다.

“애들은 저리 가라”고 하면서 “여기 나이 많이 드시고 몸이 허약하신 분들, 밤에 잠잘 때 식은땀이 나고 잠을 못 주무시는 분, 그리고 아침에 소변을 잘 못 보시는 분들, 일단 이 약 한번 잡숴봐! 이 약 한번 드시면 안방에 있는 요강이 깨져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시면 기운이 펄펄 넘칩니다!”라고 일장연설을 하면서 요상한 약을 팔곤 하였다. 지금 그 약을 살 수는 없을까?

지금은 신세대 가수들이 공연을 하고, 다양한 기획으로 시장이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10년 뒤, 30년 뒤 나주목사고을시장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전설적인’ 공연 하나쯤은 지금부터라도 하나쯤 육성했으면 좋겠다는 박영민 사장의 얘기에 공감이 간다.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전남타임스 후원

저작권자 © 전남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