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야 곰을 잡고 목사고을시장 와야 장인호떡 맛을 보제”

40년 붕어빵·호떡장사 노하우 손으로 직접 반죽한 옛날 방식 먹을거리

손귀남·한정례 부부 “재료 아무리 좋아봐야 소용없어. 정성이 최고여!”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지난 2012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들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시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나주 목사고을시장 오일장(4일, 9일)에 문을 여는 손가네호떡
찬바람이 불편 그리워지는 호떡아저씨

나주시민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추억이 있다. 옛 나주택시부 앞에서 옛 나주신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접어들면 부부가 나란히 리어카에서 호떡을 부치는 모습이다.

특히, 찬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할 때면 줄을 서서 붕어빵을 사먹던 추억은 지금도 나주 원도심의 훈훈한 풍경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봄이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 겨울이면 어김없이 골목길에 등장하던 호떡장수 부부가 자취를 감췄다. 

이름도 모르고 단지 나주시내 어디에 산다고만 들었던 그 부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종종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수소문을 해볼까 하던 중 찾았다! 거의 2년만인 것 같다.

나주목사고을 오일장을 둘러보던 중 고소한 호떡 냄새에 이끌려 찾아간 곳에 호떡장수 아저씨와 아줌마가 나란히 서서 호떡을 굽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떡맛은 역시 손맛이야!

“어머, 언제부터 여기서 일하셨어요? 얼마나 찾았다고요?”

▲손귀남 사장

난데없는 아줌마의 호들갑에 아저씨와 아줌마가 아는 체를 해준다.

“2년 전 목사고을시장 생기고 이쪽에 점포를 얻어서 들어왔어. 우리 점포가 생긴 거여.”

“아, 그럼 정식으로 호떡집 사장님이 되신 거예요? 사모님과 같이 부부사장이신 거예요?”

활달하게 웃는 아저씨와 아줌마의 이름은 손귀남(75), 한정례(70)씨였다.

두 부부가 40년이 훌쩍 넘도록 거리에서 호떡과 붕어

▲ 부인 한정례씨
빵, 풀빵을 굽다가 처음으로 창업한 ‘손가네호떡’. 상호를 대신해 걸어놓은 현수막에는 ‘장인의 손으로 직접 반죽한 옛날 추억의 맛’이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손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했던지 자꾸만 너털웃음을 웃는 아저씨는 여기저기 주문배달을 받느라 경황이 없고, 한정례 사장은 여전히 맨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주물럭거리더니 호떡을 척척 구워낸다.

“남들은 위생적이네, 어쩌네 하는 말을 하는데, 이렇게 손으로 반죽을 해야 밀가루의 찰기를 느끼게 되고 날씨가 더우면 더 묽게, 추우면 되직하게 반죽을 하는 것이 비법이여 비법.”

맞다. 요즘 붕어빵, 풀빵은 공장에서부터 레시피가 정해져 나온다는데 이렇게 손의 감촉으로 반죽을 간 보고 재료를 배합하는 것 자체가 바로 손맛인 것이다.

나주장이 더 맛있는 시장이 되어야

부부가 처음 풀빵장사를 시작했던 것이 1970년쯤이라 하니 만약 이 분야에 문화재 지정종목이 있다면 무형문화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두 부부.

시장에 들어오고부터 메뉴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호떡과 붕어빵이 메뉴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핫도그, 핫바, 꽈배기, 도너츠, 꿀떡까지 종류가 다양해졌다.

장날이면 새벽 5시부터 나와서 장사를 시작했다. 다른 장꾼들이 새벽바람에 나오는데 아무래도 탁배기 한 잔으로 해장을 하는 것보다 따끈한 호떡으로 아침요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예전에는 4일, 9일 장날이 아닌 날은 시내에 나가 장사를 했는데 이제는 부부 모두 칠순을 넘기면서 장이 쉬는 날은 덩달아 쉬고 있다고 한다.

▲목사고을시장 오일장옥의 유일한 먹거리코너에 오늘도 아저씨, 아줌마들 잔치판 벌어졌다.
장사를 하는 날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평생에 갖고 싶었던 자기 점포를 가진 것이 뿌듯하기만 하다는 부부. 하지만 목사고을시장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목사고을시장이 현대식으로 잘 꾸며져서 편하기도 하고 북적북적 행사도 많이 하니까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긴 좋제. 전국에서 구경을 오고, TV에도 소개가 여러 번 됐으니까.

그런데 진짜 나주를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만들려면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서로 아는 사람들 만나서 얘기도 하고, 맛난 것도 나눠먹고 하는 공간이 있어야 한디 점포가 너무 좁은 것이 아쉽제. 그렇다고 길에다가 난장을 펼칠 수도 없는 것이고...”

나주만의 별미로 손꼽을 호떡을 위해 

이연숙 시인의 시에 ‘뼈아픈 호떡’이 있다.

‘어릴 적 엄마는 호떡 장사를 했지 / 호떡 하나 먹고 싶어 / 엄마 옆에서 호떡을 봉지에 담아주며 / 호떡 굽는 엄마 언저리 / 콩기름 냄새 흠뻑 배이게 / 서성이며 /호떡은 마냥 익어 가는데 / 호떡 하나 내밀지 않은 우리 엄마 / 호떡 하나 집어 먹지 못하는 나 / 아니 호떡 하나 먹고 싶다는 그 말도 못하는 나 / 그렇게 호떡은 강물을 넘고 또 넘고 / 삼십 년이 지나 호떡 얘기를 꺼내는 나 / 아니 먹고 싶으면 그냥 먹던지 / 아니면 말이라도 하지 / 이제사 호떡 얘기에 맘 상하는 우리 엄마 / 다른 사람의 반죽에 익숙한 / 내 유년의 골목 언저리 빙빙 돌며 / 아쉬운 머뭇거림은 늘 숨어 / 하고 싶은 대로 말이라도 해보았으면 / 때늦은 호떡 타령은 안 할걸 / 호떡은 늘 그렇게 목구멍에 걸려있다 / 호떡이 먹고 싶었던 아득한 거리 /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걸어온 그 길에 식은 호떡이 있고,/ 목젖에 걸리는 뼈저린 둥근 아픔 / 말 못하는 수줍은 호떡 하나 /먹고 싶다고 말 못하는 내가 / 달빛에 걸린 호떡을 보며 / 이제는 말해야지 이제는 말해야지’

그러고 보면 손귀남·한정례 부부에게도 딸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결혼해서 어엿하게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외동딸. 부부는 40년 동안 호떡을 구우면서 그렇게 딸을 키워냈고, 지금은 두 부부의 노후를 위해 호떡을 굽고 있다.

서울 종로에 가면 운현궁 옆에 100년 전통의 호떡집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주곰탕도 대를 잇고, 홍어집도 대를 이어 장사를 하고 있는데, 손가네호떡은 그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것일까?

이미 반세기의 세월은 저장을 해 놓았으니 누군가 나서서 나주의 고소하고 달콤한 맛으로 호떡을 구웠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 김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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