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어물 취급 36년 베테랑 트럭 몰고 좋은 물건 직접 골라와

이쟁호 사장, 이윤 추구보다는 손님들에게 만족감 돌려주는 것이 영업비결

“자식 가르치고 식구들 먹여 살리려 시작한 장사, 지금은 부부의 노후대책”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지난 2012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들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시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비 내리는 장날 인심 난다

▲나주목사고을시장 매일시장동에 있는
나영건어물
초겨울, 비 내리는 장날은 온종일 축축하다. 상인들도 비에 젖어 축축하고, 오신 손님들도 축축하기는 마찬가지. 아주머니가 꼴마리에서 꺼내주는 꼬깃꼬깃한 지폐도 금방 축축해지고 만다. 그래도 장날은 장날이다.

지난 24일 찾은 나주목사고을시장은 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주차장과 상가 주변에 빼곡히 차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간신히 차를 대고 찾아들어간 매일시장동은 여느 장날과는 다르게 한적했지만 여전히 손님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7.5평 좁은 상가 안에 아주머니 몇 분이 오순도순 커피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도 “추운데 커피 한 잔 하고 가시라”며 소매를 잡아끄는 아주머니의 성품이 바로 나주목사고을시장 상인들의 인심을 보여준다.

▶이쟁호 사장과 유일순 부부가 운영하는 나영건어물 가게가 시제철을 맞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36년 단골사랑방 나영건어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북어쾌가 나란히 정돈 돼 있는 나영건어물 가게가 시제장을 보려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올해는 윤달이 끼어 10월에 지내는 시제가 늦어진 가운데 10월 초하룻날이 되는 지난 22일을 전후해 부쩍 손님이 붐비기 시작한 것이라고.

옛 금계동 매일시장을 시작으로 나주 오일장까지 나영건어물 단골손님은 36년을 헤아리고 있다.
이쟁호(73·나주시 금계동)사장과 부인 유일순(68)씨가 손님을 받느라 말 붙일 짬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점심나절을 앞두고 잠시 짬이 나는 틈을 타 두 부부의 인생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성함이 진짜 쟁자 호자세요? 대게는 정자 호자를 쓰는데요?”
“집안이 호자 돌림인데 큰집 형이 정호라는 이름을 써서 나는 쟁호가 됐소이다.”

남의 이름을 갖고 시비를 거나 핀잔을 할만도 하건만 호탕하게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주인양반, 고향은 나주시 세지면 발산마을, 전의이씨(全義李氏)가 자자일촌하는 마을이란다. 송원장학재단을 설립해 지역의 인재양성에 한 몫을 담당했던 고(故) 이교은 회장의 고향마을이기도 하다.

이 곳 발산마을에서 2남2녀 중 막둥이로 태어난 이쟁호 사장은 광주시 남구 대촌동 고싸움놀이로 유명한 칠석마을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지금까지 백년해로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결혼 하고 처음 몇 년 동안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서 분가를 결심하게 됐다.

▲고객을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36년 한결같이 단골손님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하는 이쟁호 사장

시골에서 농사 지어 자식들 교육시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갈파한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금계동으로 이사를 와 매일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시작한 세월이 훌쩍 36년이 된 것이다.

자식들 가르치는 보람으로 고단한 줄도 몰라

큰딸의 이름을 따 ‘나영상회’로 시작한 나영건어물은 이쟁호 사장 부부에게는 한 가정을 지탱하는 버팀목이기도 했지만, 지역경제의 든든한 동반자이기도 했다.
부모의 정성과 성실한 모습을 보고자란 2남1녀의 자녀들이 모두 어엿하게 국립대를 나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쟁호 사장의 마음 한 켠엔 아쉬움이 남아있다.
“자식 자랑 같지만 다들 공부를 잘 했어요. 주변에서는 서울로 대학을 보내라고들 했지만 우리 내외 장사해서 자식 세 명을 한꺼번에 가르치기는 힘에 벅찼죠. 서울로 학교를  보내면 당장 하숙비며 학비걱정이 앞서서 지방에서 국립대를 보낸 게 아쉬움이 남죠. 큰집 자제들은 모두 서울대 나오고 그랬는데...”
그 시절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매일시장과 나주장을 오가며 쉬는 날도 없이 장사를 했지만 재작년 나주목사고을시장으로 입점을 하면서 이제는 시간의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오던 부부에게 시련이 닥친 건 12년 전쯤이다.
밤낮 없이 부창부수로 함께 일해오던 부인 유일순 씨가 시신경 뇌종양 판정을 받은데다 설상가상으로 심장까지 문제가 생긴 것.

그해 1월부터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검사가 진행되었고 3월에는 12시간이라는 대수술 끝에 심장수술을 하고 그로부터 두 달 뒤 뇌수술을 했다.
주변사람들의 기도와 격려 속에 건강을 되찾은 부인 유일순 씨는 세상을 다시 산다는 마음으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그 누구 보다 더 반갑게 맞이하고 살갑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부부가 건강하게 사는 것

오직 일만 하며 살아 온 부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째 매일 새벽이면 금성산 등산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더라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건강을 잃어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이 두 부부가 목사고을시장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있다. 리어커로 장사를 해오다 나이 쉰 살이 되어서야 1종보통 운전면허를 따 트럭운전을 하게 됐다는 이쟁호 사장, 트럭을 운전하면서부터 좋은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서 물건을 받아 오기 때문에 나영건어물의 물건은 ‘확실’하다는 보증을 받고 있다. 또한 이윤을 남기기보다는 손님들에게 만족감을 돌려주는 것이 바로 이쟁호 사장의 영업비법이기도 하다. 가게 앞을 그냥 지나가는 손님일지라도 목사고을시장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따끈한 차 한 잔을 대접하는 인정이 이쟁호 사장에게는 몸에 밴 상인정신이 되고 있다. 비록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두 부부가 하루 종일 마주보고 앉아 있는 날도 있지만 그런 날도 장사 안 되는 것을 한탄하기 보다는 “하루 빨리 경기가 풀려야 서민들도 먹고 살고 우리 같이 살텐데...”하며 통 큰 위안을 삼는다. 
/ 김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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