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선
전남외국어고등학교 교사
한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1만년 전인 기원전 8000년경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깨뜨린 돌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간석기와 흙으로 만든 토기를 사용하였으며,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원시적인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유적지는 한반도 전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에 분포되어 있다.

전남 지역에서는 신안, 여수, 장흥, 순천, 함평, 보성 등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나주 지역에서는 아직 신석기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다시면 복암리에서 돌을 갈아 다듬는 간석기 제작 도구인 ‘갈기’ 유물이 발굴되었고, 다시면 가흥리에서는 벼농사 흔적을 보여주는 기원전 1000년경의 ‘벼 꽃가루(花粉)’가 발견되었다.

또 지표조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어망추가 발견되어 나주 지역 신석기 문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신석기 시대에는 지구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얼음이 녹아 바닷물이 많아졌고 이로 인하여 해수면이 상승하여 대륙의 모양이 지금과 비슷해졌다.

이 시기 사람들은 온화하고 살기 좋은 지역을 찾아 한곳에 머물며 정착 생활을 시작하였다.

▲갈기

수백만 년 동안 먹을 것과 살기 좋은 장소를 찾아 끊임없이 이리 저리 이동하며 생활하였던 인류가 신석기 시대에는 들판으로 나와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농사를 짓고 목축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짐승 사냥이나 물고기 잡이, 식물 열매와 껍질 등의 채집으로 먹을 것을 해결하였던 사람들은 이때부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조, 피, 수수 등을 재배하였으며, 돌낫이나 뼈낫으로 수확하여 돌판에 곡식을 갈아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처럼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사짓기에 편리한 강가나 바닷가에서 움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신석기 문화가 존재하였던 영산강 유역의 나주 들판에서도 사람들은 이처럼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문화’라는 생존수단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 역사를 전개해 왔다.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여러 사회·문화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전혀 새로운 차원의 놀라운 생산 양식이다.”라고 하였고,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 표현하였다.

▲빗살무늬토기
이것은 인류가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정착생활이 가능해졌고 인구가 크게 늘어나 지구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은 조개더미이다. 전남지역에서도 신안군 흑산도·하태도·가거도에서 조개더미(패총)가 발견되었고, 해남 두모, 신안 지도 어의도, 여수 송도의 조개더미에서 이음 낚시와 간석기, 덧무늬 토기 등이 발견되어 신석기 시대 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개더미는 조개 속살을 꺼내 먹고 버린 껍데기가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일종의 쓰레기더미이다. 강가나 바닷가에 널려있는 조개는 쉽게 구할 수 있고 먹기도 편하였으며 부드럽고 싱싱한 속살은 소화도 잘 되었을 것이다.

조개더미에서는 짐승의 뼈로 만든 낚시 바늘과 돌로 만든 그물추 등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가졌는데 아마 여러 가지 물고기를 잡는 데 각각 사용되었던 것 같다.

조개더미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흙그릇(토기)는 구석기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유물이다. 흙으로 빚은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릇은 곡식을 담아 두거나 요리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구석기 시대에 비하여 생산량이 늘어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가장 많이 발견된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표면에 직선의 머리빗 모양의 줄무늬가 있어서 빗살무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바닥이 뾰족하여 강가나 바닷가 모래 위에 구덩이를 파고 쉽게 고정시킬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농사 기술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생산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따라서 농사와 함께 여전히 사냥이나 물고기 잡이,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을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신석기시대에는 이처럼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아 남는 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이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별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즉 지배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전체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는 있었으나, 이는 경험이 많은 유능한 사람으로서 농사나 사냥과 같은 생산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었을 뿐 지배자는 아니었다.

또 이 시대에는 해, 달, 산, 강, 동물, 바위, 나무 등에 영혼이 있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애니미즘’이 생겨났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결시켜서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유행하였다.

또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장례식을 치루고 조상의 영혼을 모셨다. 이러한 신앙은 예술 활동으로도 이어졌는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각상이나 조개껍데기 가면 등의 유물들은 그 시대 신앙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주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남해안과 도서지역 및 가까운 영산강 유역의 인접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확인되었으므로. 앞으로 지표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나주 지역의 영산강 퇴적층에서도 신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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