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문화 보급과 함께 마한시대 ‘활짝’

 ▲박태선
전남외국어고등학교 교사
한반도에 철기가 처음 보급된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이다.

고조선이 한참 성장하고 있었던 이 시기에는 아직 철기보다 청동기와 석기 또는 나무 도구가 더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에 들어서면서 철제 농기구와 무기 등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철기가 청동기를 대신하여 이렇게 널리 사용된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철기는 청동기에 비해 창끝과 칼날을 훨씬 날카롭게 만들 수 있고, 또 그 날이 쉽게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둘째, 철은 구리보다 매장량이 많고 청동기처럼 합금이 아닌 단일 금속이기 때문에 철광석만 있으면 그것을 녹여 쉽게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만들어진 철기는 농사를 지을 때 쓰는 도구나 여러 가지 공구, 그리고 칼과 창 같은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기원전 4~2세기 동북아시아에서는 인구 이동이 활발하였다. 중국에서는 통일을 향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내전이 거듭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서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고조선으로 이주하거나, 또 그들 중 일부는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철기 문화는 그들을 통해 한반도에 확산되었다.

전남 지역에 철기가 들어 온 시기는 대략 기원전 3~2세기쯤이다.

이 시기에 나주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남도 곳곳에는 마한의 작은 국가들이 생겨난다.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집터와 조개 무덤, 그리고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있다.

철기시대 집터 모양은 원형이나 사각형으로 변화하며 바닥 깊이도 얕아져 평지와 비슷해진다. 무덤은 주로 구덩이를 파고 나무관을 넣은 널무덤(토광묘)이나 항아리 안에 시체를 넣어 묻은 독무덤(옹관묘)이 있으며, 주변에 도랑을 판 무덤(주구묘)도 발견된다. 널무덤은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에서 주로 많이 만들어졌고, 독무덤은 전라도의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나주 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다시면 복암리 유적, 동강면 장동리 수문 조개무덤, 공산면 금곡리 용호 유적이 있다.

다시면 복암리의 고분 유물전시관 부지에서는 중국 신(新) 왕조에서 사용된 화폐인 ‘화천(貨泉)’이 발굴되었다.

 ‘화천’은 신 왕조를 건국한 왕망이 왕으로 있던 서기 14년에 처음 주조되기 시작하여, 후한 초기인 서기 40년까지 짧은 기간에 제작되고 유통되었던 화폐이다.

이것은 나주 사람들이 철기 시대에 이미 영산강 수로를 통하여 중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동강면 장동리 수문 조개무덤은 범위가 약 15,000㎡ 정도 되는데, 지표면에 드러난 조개 껍데기는 대부분 참굴 종류이다. 여기에서는 민무늬토기, 옹관조각, 석기 조각 등이 확인되었는데, 토기는 주로 항아리와 시루로 보인다.

공산면 금곡리 용호 마을에서는 해발 20~30m의 나지막한 구릉에서 총 20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매장시설은 총 34기이며 널무덤 11기, 독무덤 23기가 있다.

이 유적은 3세기 널무덤에서 4세기 독무덤이 등장하는 시기까지 나주 지역 무덤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철기 시대부터 옹관고분 시대까지 나주 지역의 철기 문화가 꾸준히 계승되고 발전되어 왔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철기의 보급은 당시 생활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 시기 철로 만든 괭이와 보습, 낫 등의 농기구가 보급됨으로써 땅을 보다 깊게 갈 수 있고 황무지 개간도 쉬워졌으며, 적은 인력으로도 넓은 토지를 농사지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인구도 증가하였다.

또, 날카롭고 단단한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전투력이 향상되어 부족 간의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우수한 철제 무기를 가진 부족은 주변 부족을 정복하여 세력을 더욱 확장해 갔다.

철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에 비하여 전문적인 직업이 늘어났고 사회의 계급도 더욱 뚜렷해졌다. 이러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만주와 한반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나라가 성립되었다.

삼한은 한강 이남부터 한반도 남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전했던 여러 작은 국가들의 연합체인 마한, 변한, 진한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삼한이 언제 어떻게 건국되었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로 보아 초기 철기 시대인 기원전 3세기 전후로 짐작한다. 삼한 중 마한이 가장 강성하였으며 마한을 모태로 진한과 변한이 생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주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마한은 54개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호수가 10여만 호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한은 신라로 발전하고, 변한은 가야로 발전하였지만, 가장 강력하였던 마한은 백제에 병합되어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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