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선교사
/나주외국어고등학교 교사
경기도 고양과 용인, 충남 부여, 전북 완주, 전남 영암 등지에서 청동기 거푸집이 많이 발견되었다. 훗날 마한이 세워진 이곳에서 다양한 청동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독자적인 세력이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 철기문화는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랴오닝 지역의 사람들이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던 청동기 문화는 점차 쇠퇴하고 좀 더 우수한 철기 문화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세형동검과 덧띠토기가 제작되었다.

초기 철기문화는 이처럼 한반도 중부의 금강 유역에서 먼저 나타난다. 이 지역은 중국 연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선진적인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금강 유역의 철기문화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철기 문화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쪽 사람들과도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원전 3세기 전후에 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토착민들은 중국과 한반도 북서부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함께 서로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초기 철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된 정치 집단들은 점차 성장해 가면서 주변의 세력과 서로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금의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서로 필요에 따라 정치 집단들이 결속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연맹 국가의 수준은 아니었다.

기원전 2세기에 철기 문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이 무렵까지 덧띠토기문화와 세형동검문화가 아직 남아 있어 철기문화와 공존하다가, 이후 실용적인 철기문화가 성행하면서 점차 청동기는 사라졌다.

철기 문화는 계속해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정치 집단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점차 서로 통합해 가면서 많은 소국을 이루었고 나아가 삼한이라는 연맹국가로 성장하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은 변한과 진한보다 더 일찍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며 발전하였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한(韓)이라는 정치 집단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중국의 기록을 통해서도 삼한의 존재는 확인된다.

기원전 1세기 이후에 마한에 속한 소국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위만 조선이 멸망하면서 유민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한군현이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한반도에는 본격적인 철기 문화가 확산되었고, 이로 인하여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철기 교역권이 확대 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마한의 교역권은 약화되었고 세력도 위축되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 3세기 전반에 중국의 위나라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접수하고 삼한에 대하여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마한, 진한, 변한의 여러 소국들은 서로 결속을 맺어 소국연맹체를 형성하였다.

삼한의 소국연맹체는 백제와 신라와 같은 고대 국가로 발전해가는 중간 단계였다. 소국들은 각각 서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맹주국과 관계도 수직적인 지배와 복속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삼한의 소국연맹체는 마한지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마한 지역은 소국의 수도 많았고 영역도 넓었다. 3세기 전반 54개 마한소국연맹체는 중부, 호서, 호남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각자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마한 54개 소국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는데,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 작은 나라의 지배자는 ‘읍차’라고 불렸다.

마한의 소국연맹체는 한강유역권, 아산만권, 금강유역권, 영산강유역권, 남해안권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가장 일찍 성립된 금강유역권은 3세기 중엽까지 마한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전남타임스 후원

저작권자 © 전남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