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유역의 초대형 옹관묘

▲박태선 선생/나주외국어고등학교
영산강 유역은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영산강은 강이라기보다 내륙 안의 바다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어서 상류지역까지 항해가 가능하였다.

따라서 영산강은 내륙과 바다를 잇는 중요한 물길이 되어 다른 지역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고, 영산강 유역의 세력들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잔무늬거울과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한다.
이는 충청도 아산만 지역에서 시작되었던 철기 문화가 영산강 유역으로 전파된 결과였다.

이후 광주 신창동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벼농사 중심의 수준 높은 문화가 발전하였고, 금강 유역권과 비슷한 분구묘가 보급되었다.

분구묘란 흙이나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 형태를 말한다.

분구묘는 처음 나무널(목관)을 사용했지만 점차 항아리(독)에 시체를 묻는 옹관이 등장한다.

옹관은 백제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무렵인 3세기경에 마한의 여러 지역에 나타났다.

옹관은 초기에 실생활에 사용되던 항아리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점차 ‘U’자형의 시체 매장을 위한 전용 옹관으로 바뀌어 갔다.

3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던 독무덤은 둥근 모양과 네모 모양으로 흙을 쌓은 무덤 안에 지하식이나 반지하식으로 옹관을 한 개 또는 여러 개를 묻었다.

독무덤에는 구멍 뚫린 단지와 긴목항아리 등 영산강 유역 고유의 토기를 비롯해 나주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처럼 권력자의 유품을 함께 묻었다.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은 6세기 중엽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이 등장하면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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