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선 선생/나주외국어고등학교 
백제 근초고왕이 서남 연해안과 전라도 지역 마한 소국을 정벌했던 369년 이후 마한의 마지막 중심지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영산강 유역의 나주시 반남면과 다시면 복암리 일대였다.

반남과 다시 복암리 일대의 마한 세력은 넓고 비옥한 나주평야와 영산강의 수로를 활용한 대외 교류 활동을 통해 마한의 최대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금동관
6세기 중엽까지 반남과 다시 복암리 일대가 마지막 마한의 중심지였음은 40여 기의 거대 고분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반남 고분 중 덕산리 3호분은 남북 길이 45m, 높이 8m의 봉분이다. 연인원 5천명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되어 축조된 거대 봉분으로 백제 무령왕릉보다 훨씬 크다.

금동신발
신촌리 9호분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과 고리자루큰칼 등이 출토되었다. 대형 옹관과 당시 최고 수준의 화려한 유물들은 영산강 유역의 나주 지역이 백제와 다른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고,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지배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나주 반남의 마한 세력은 6세기 초까지 일본 큐슈 지역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본의 정세 변화로 큐슈 지역과의 연대가 끊어지고, 백제의 적극적인 남진 정책으로 나주의 마한 세력은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고리자루큰칼

6세기 초까지 유지되던 영산강식 돌방무덤이 사라지고, 6세기 중엽에는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이 등장한다. 이것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이 6세기 중엽에 백제에 본격적으로 병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도 독자적인 세력과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며 존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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