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백호 임제(林悌 1549-1587)를 만나러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있는 백호문학관를 찾았다.문학관 입구의 부조에는 무어별(無語別) 시가 새겨져 있다.

無語別
수줍어서 말 못하고

十五越溪女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
수줍어서 말 못하고 이별이러니
歸來掩重門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고선
泣向梨花月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시가 마치 한 폭의 그림,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허균도 ‘학산초담’에서 무어별을 규원시(閨怨詩)로 소개하고 있다.
문학관에서 전시물을 보았다. 무엇보다 임제의 대표작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황진이에 대한 시조이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1583년 그의 나이 35세에 평안도 도사로 발령을 받고 임지로 가는 도중에 송도에 들렀는데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닭 한 마리와 술을 들고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제문과 시조를 지어 애도하였다. 참으로 자유분방한 풍류객답다. 그런데 이런 파격이 문제가 되어 조정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한편 임제의 소설도 전시되어 있다.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수성지 愁城誌〉, 〈화사 花史〉가 그것이다.

<원생몽유록>은 주인공 ‘원자허(元子虛)’가 꿈속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비분한 마음으로 흥망의 도를 토론하였다는 내용으로 임제가 28세에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소재로 정치권력의 모순을 폭로하였는데, 실제로 임제와 친교가 있었던 판서 박계현이 1576년 6월에 경연 석상에서 선조에게 성삼문의 충절을 말하고 남효온의 <육신전>을 읽어보라고 권했다가 선조의 진노를 샀다(선조수정실록 1576년 6월1일).

수성지〉는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소설이고, 〈화사〉는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소설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김은선 사무국장에게서 <서옥설 鼠獄說(재판받는 쥐 이야기> 책 한권을 얻었다. 2014년에 나주임씨절도공파백호문중에서 발행한 것인데, <서옥설>이 임제의 소설임을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재일작가 이은직도 <조선명인전>에서 <서옥설>이 임제의 대표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필자도 북한 고등교육도서출판사가 2002년에 발간한 <조선의 력사인물 2>에서 <림제와 재판받는 쥐>를 읽은 적이 있다.

우화소설 <서옥설>은 간사한 늙은 쥐가 나라의 창고 벽을 뚫고 들어가 쌀을 훔쳐 먹다가 발각되어 재판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교활한 늙은 쥐는 재판관인 창고신의 무능함을 이용하여 무려 80여종의 동식물에게 자기의 죄과를 덮어씌운다.

마지막 부분은 늙은 쥐가 상제에 의하여 처단되고 억울하게 갇혔던 수많은 날짐승과 길짐승들은 각각 자기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임제는 소설의 마지막을 태사씨의 말을 빌려 ‘아! 간사하고 흉악한 성질을 가진 자들이 어찌 창고를 뚫는 쥐뿐이랴? 아 참! 두려운 일이로다’고 한탄하면서 장식한다.

<서옥설>은 당시 사회의 부정부패를 질타하면서, 임금을 비롯한 모든 통치자들의 죄상을 추궁하는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정신을 보여준다.

이러했으니 임제는 법도외의 인물로 배척받았다. 미치광이로 취급받았다. 임제는 자작시 ‘이 사람’에서 자신을 ‘우주 간에 늠름한 육척의 사나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는’ 자로 표현하였다.

내친김에 영모정과 물곡비(勿哭碑)를 보러간다. 임제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죽기 몇 달 전에 ‘자만(自挽)’ 시를 지었다.

강한 江漢의 풍류 사십년 세월
맑은 이름 당세에 울리고도 남으리라.
이제는 학을 타고 속세 그물 벗어나니
해상 海上의 복숭아는 열매 새로 익으리라.

그는 죽으면서 슬퍼하는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사해(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황제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추한 나라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곡(哭)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하는 말이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 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였다. 이익은 <성호사설> ‘인사문’에서 임제의 유언을 언급하면서 임제가 농담을 즐겨 했다고 하였다.

사실은 촌철살인이고 임제의 자주 사상가로서의 면모였다. 백호 임제를 다시 본다. 이제 그는 사회비평가, 자주 독립 사상가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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