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을 넘어 대륙으로 통일 미래로

▲김노금
나주시민주평통자문위원
북한의 도발로 인한 준전시 체제로 인해 평통위원 역량강화 연수는 당분간 연기한다는 결정이 있은 지 정확히 24시간 후 남북의 극적 타결로 인해 다시 재개된 연수였다.

통일에의 국민적 염원이 간절했던 몇 일간의 우여곡절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주보는 열차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돌진 하는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을 보면서 혹시나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저들이 앞 뒤 분간 않고 저지를지도 모를 전쟁의 두려움에 잠시 가슴을 졸여야 했던 며칠간이었다.

그리고 평화라는, 또 통일이라는 의미가 가슴을 절절하게 했던 한 주간을 경험해야 했다.

때문에 이번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 운동의 근원지인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우리들의 마음은 얼마간의 비장감과 그 어느 때보다도 통일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세시에 나주를 출발하여 오후 두시에 도착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보다는 조금은 선선한 기후였다.

블라디보스톡이란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가진 소련 극동 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 기지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이기도 한 도시이다. 국립 극동대학 내에는 해외 최초의 한국학 단과 대학인 한국학대학이 있을 정도로 이제는 한국과의 정서적 유대감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일행의 안내를 맡은이는 20여 년 전 에 이곳에 와서 러시아여인과 결혼도 하고 완전히 정착을 해서인지 현지 언어와 문화에 익숙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은 대단히 투철해 보여 우선 믿음이 갔다.

그의 안내를 통해 들어야 했던 디아스포라... 항일 독립운동,..스탈린의 강제 이주라는 말들은 듣는 내내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민족의 가슴시린 처절한 역사에 우리의 가슴을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먹먹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를 돌면서 그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한시도 귀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역사와 빼앗긴 조국을 찾겠노라 연해주 대륙을 떠돌며 죽어야했던 독립군들의 이야기들에 우리들 평통 연수생 일행들은 많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혁명광장을 지나 그 찬란했던 재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를 기념하는 개선문 옆을 지날 때만 해도 러시아에 왔구나 정도의 생각 외에는 별다른 느낌을 갖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극동함대 사령부를 지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Cㅡ56 잠수함 앞에 설 때에는 우선 어마어마한 길이와 큰 잠수함의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반나절 일정이었지만 토종 한국인 가이드의 민족사로 시작해서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들을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들어선지 뭔지 모를 가슴속에 꿈틀대는 것들로 요동치는 밤을 보내며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민주평통위원 역량강화 첫날 연수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튿날,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제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톡의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우골나야 역에서 버스로 갈아탄 후 약 한 시간 정도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는 중에도 민족혼을 심어주려고 작정을 하신 우리의 가이드님은 끝없이 강의를 펼치셨다.

호기심 천국인 나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그의 열변에 귀 기울이며 메모하고 묻는 내게 그는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연해주, 그곳은 한민족에게 있어 기억의 뿌리이자 약속의 땅이었다. 또한 우리 역사의 질곡과 함께하며 강인한 희망의 염원을 피워 올리던 생명의 땅이었다.

국경너머로 희망의 씨앗을 옮겨와 심었고 빼앗긴 조국을 향해 다시 국경너머 꺽이지 않는 저항의 씨앗을 실어 보내던 그 곳 연해주에서 우리는 고난과 절망을 딛고 곳곳에 싹을 틔운 씨앗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싣고 우수리스크로 향하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끝없이 바다가 펼쳐지고 조금은 눈을 돌리고 싶은데도 그와 마주앉은 나로서는 도리 없이 그의 열강을 들어야 했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전 후를 통해 독립운동을 위한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크게 늘어나고 이어 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까지 세운 개척자와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정부에 의해 외곽으로 강제 이주 당하여 척박한 맨 땅에 모진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가며 맨몸으로 세운 신개척리, 즉 새로운 한인촌이라는 뜻의 신한촌 이야기는 강인한 우리 민족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한 편의 장엄한 인간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수리스크에 당도하여서는 맨 먼저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박물관을 관람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발해의 유물인 각종 장신구들과 발해 무사들의 투구, 그리고 발해의 건축양식을 가늠할 수 있는 기와며 발해인 들이 사용하던 토기까지 실로 오랜 우리의 귀한 역사적 유물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무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치솟아 오름을 느낀 것이 나만의 것이었을까?

그 얼어붙은 차가운 동토의 땅에 내팽개쳐져 소수민족의 아픔과 멸시 천대 속에서 정착할만하면 연이은 강제이주를 당하고누 했던 그들이었다.

도무지 자기 목숨하나 부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의 역사, 우리의 민족혼, 그리고 내 조국을 위해 이토록 목숨을 바쳐가며 지키려고 했던 것 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그런 감상적인 것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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