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고려인들의 민족계몽과 항일운동

 ▲김노금
/나주시민주평통자문위원
연해주에서 민족과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인언론, 그 첫 장을 연 신문은 정규과정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아직 듣도 보도 못했던 <해조신문>과 <대동공보>였다.

그리고 1910년대의 <권업신문>과 <대한인정교보>가 이어지는데 이 신문들은 모두 민족의식 고취는 물론 당시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는데 그 목적을 둔 신문들이었다.

이들 신문은 쌍트페테르크 국립박물관과 국립도서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고 우리가 본 것은 사본이었다.

그런 오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신문을 그리고 그토록 큰 민족혼과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신문을 옛 우리의 땅 발해의 옛 터, 그 먼 연해주 우수리스크 땅에서 마주대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속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한인생활사 유물로 전시된 아동 의복 곁에 씌여진 안내문을 읽어 내려 갈 때의 아려오던 통증 같은 것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황토색물이 덜 빠진 예닐곱 살 남자아이가 입었음직한 옷 옆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어 급히 메모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주 초기의 한인 아이들은 가사노동을 돕거나 거리를 배회하는 식으로 방치되었고 근대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교육열이 높아진 것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의 열망이 높아지면서부터였다.”

연해주, 이 땅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을 불태웠던 곳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가면서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격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3·1만세 운동도 연해주에 번진 커다란 들불이 되었고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혼을 심어 타올랐던 불 꽃 혼들이 지금 이 시간도 꺼지지 않는 혼불이 되어 연해주 땅을 밝히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참으로 애국열사 아닌 이가 아니 계신다. 우리 역사에 너무나 찬란한 별로 우뚝 서 계신 안중근 의사도 연해주를 본거지로 한 의병비밀결사 독립 단체 ‘동의회’ 소속이었음을 이번 연수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12명의 단원과 함께 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기위해 왼손 무명지를 끊어 피로 쓴 ‘대한독립’ 네 글자의 혈서가 오늘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광활한 옛 우리의 땅 발해 솔빈부의 성터

대한광복군 정부 최초의 초대 대통령 이상설 선생,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 쓸쓸히 서있는 유허비는 2001년 고려학술 문화재단에서세운 비석인데 이 비석은 발해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에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어찌 영혼인들 무슨 면목으로 고국으로 갈수 있겠는가? 내 시체와 유품을 모두 불살라 시베리아 벌판에 뿌리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한다.

선생의 유허비를 뒤로하고 얼마를 달렸을까?

차는 그야말로 구불구불한 옛 신작로 같은 길을 달린 것 같다. 하늘과 땅이 맞닿을 것 같은 광활한 땅, 바로 발해 솔빈부의 옛 성터에서 새삼 우리나라가 다시 이 땅을 차지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잠시 심란해 지기도 했었다.

지금도 땅을 파면 옛 찬란하고 영화로운 발해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하는 이 넓고 넓은 땅, 가스와 석탄과 기름이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이 보배로운 땅을 우리는 어찌하여 남의 손에 넘겨주어야만 했을까?

오랜 세월을 가이드 생활을 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사 안내에 관한한 그는 거의 달인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끝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면서도 한 사람 한사람의 시선을 모두 자신에게 묶어놓는 특별한 힘이 있어 도무지 눈 과 귀를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안내 중에 가장 집중적으로 소개했던 분이 바로 최재형 선생이셨다.

1911년 신한촌에 본부를 둔 권업회가 창설되면서 초대회장으로 활동 했던 최재형 선생은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군 양성과 정부수립을 목표로 정하고 활동을 펴왔다고 한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스예프스키로 이주하였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독립자금을 대고 또 댔는데 독립자금의 액수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액수였다고 한다.

대단한 재력가이기도 했던 그는 러일 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 했으며 또 한인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단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하기도 한 그는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 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암살>의 줄거리와 자꾸 겹쳐져서 묘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는데 얼마 전 까지도 러시아인이 살았던 그의 생가는 2014년 드디어 매입했단다.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귀환하는 내내 조국을 찾겠노라 말달리던 선열들의 모습들이 그 드넓던 땅 발해의 푸르름과 겹쳐 떠올라 애잔하고도 몹시도 아쉬운 마음이었다.

아무르만을 따라 해변가에 위치한 해양공원에서 잠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일행과 해변가를 거니니 조금은 마음이 열려지는 듯싶었다.

러시아 무기 역사의 총본산인 블라디보스톡의 요새 박물관까지 들러보고 나니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욕심껏 진행되었던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에서의 하루 일정표를 훑어보면서 많이 뿌듯했지만 조국광복을 위해 피와 눈물로 쓴 이 땅의 역사 앞에서 삭신이 욱신거린다는 표현조차 죄스런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홀로 던져 보았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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