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준
(수필가, 목포시 거주)
군대에서 제대하고 예비군 옷을 입었을 때에는 세상이 돈짝만 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예비군이 끝났을 때에는 조금 서글퍼졌고 민방위마저 끝났을 적에는 인생이 상당히 심각하게 서글퍼졌다.

그러다가 정년퇴임을 할 때에는 무척이나 허망하고 쓸쓸했다.

단상에 앉은 저 송 교장 내외도 지금쯤 좀 허전한 느낌에 휘청거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보면 사십 년의 기나긴 세월을 별 탈 없이 교직에 봉사하고 무사히 끝마친 공적도 퍽이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교단에 서면 누구나 정년퇴직에 이를 것 같지만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66년, 내가 나로도 봉래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송 교장 사모님은 그 학교에 나와 함께 근무하는 선배 교사의 따님이었다.

김 선생님의 사택 앞 우물가에서 하얀 여중학교 교복을 입은 그 따님을 몇 번 보았던 기억이 있다.
참 인연이 묘하다.

세월이 흘러 송 선생의 집에 놀러가 보았더니 그 여중생이 송 선생 사모님이었다.

광주에서 자취인가 하숙인가 같은 집에서 하다가 인연이 닿았다던가.

송 선생과는 목포항도여중, 제일중에서 함께 근무하며 우의를 쌓았다.

제일중학교에서는 그가 3학년 주임을 맡았는데 신나고 즐거운 술자리가 많았다.

그가 조도중학교 교감이 되고서는 퇴직한 ‘코끼리떼’ 회원 넷이서 또 진도 조도까지 놀러가서 점심을 먹으며 우의를 다졌다. 조도가 참 이상한 섬이었다. 물고기가 귀했다.

하는 수 없이 돼지고기를 먹었다.

몽탄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나 혼자 8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몽탄으로 놀러갔다.
송 교장은 몽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떡갈비 집으로 안내했다.

맛난 떡갈비에 소주를 마시며 꽤 오랫동안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다 잊어버렸다.

목포제일중학교에서 전교조의 전신인 평교사회 결성으로 인연을 맺은 모임이 ‘코끼리떼’였다. 제일중학교 뒷산 이름이 ‘코끼리산’이었다.

이름을 ‘코끼리떼’로 짓다 보니 회장을 ‘떼장’이라 부르고 총무를 ‘떼총’이라고 부르는 희극이 벌어졌다.
원래 11명인데 공사다망하여 몇 명 빠졌다. 여름 겨울방학 때마다 만나 술잔을 기울인 지도 어언 서른 해가 가까워지는가 보다.

왕건의 전설이 휘감아 도는 꿈여울 몽탄(夢灘)면의 몽탄중학교! 넉넉한 교정은 정겹고 아늑하기 짝이 없는데 학생 수가 해마다 줄어들어 시름이 많다.

송 교장의 다정한 가족들, 누구나 다 퇴임할 때에는 이렇게 북적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을 것 같지만, 만고풍상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게 그리 간단하고 수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송 교장의 퇴임식 다음 날인 8월 27일 오후 세 시, 나는 28일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조카의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KTX를 탄다.

나의 형제 매제 중에는 박사가 몇 명 있지만 다음 세대인 조카들 중에서는 박사가 처음인지라 참 뿌듯한 심정으로 기차에 오른다.

나는 은퇴한 교사들의 모임인 ‘화백회’ 회원들을 임 박사, 문 박사라고 부르지만 그야 그냥 인생을 오래 살면서 주워들은 것도 많고 지혜롭다는 뜻에서 붙인 애칭이지, 진짜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그냥 아무 대학도 아니고 서울대학교에서 박사를 따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게다가 서울대학교도 아니고 다른 대학교 출신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온갖 눈치와 냉대를 받아가며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모르면 몰라도 그 고충을 필설로 형용키 어려웠으리라.

이런 자리를 축하해 주지 않고 또 어느 자리를 가겠는가.

기차 타고 서울 가본 지 꽤 오래 되었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이 참 정겹고 황홀하다. 산 위의 뭉게구름은 찬란한 햇빛을 되쏘며 수제비 반죽처럼 가닥가닥 찢어지고, 묘역공사에 쓰일 하얀 석재들은 태양을 우러르며 찬연하게 빛난다.

고국의 산하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내 일찍이 중국도 몇 곳 돌아보고 타이 터키 발리 북유럽도 구경했지만 국토가 좀 비좁아서 광활하고 호방한 맛은 부족하지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고 오순도순하고 수려하고 다양하기로는 우리나라도 결코 다른 곳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아이고, 놀랍고도 놀라워라. 옛날에는 보름씩 걸리던 한양 길을 시속 300킬로에 육박하는 고속열차는 목포를 떠난 지 두 시간 반 만에 용산역에 도착한다.

박사 학위를 받은 조정구의 아버지는 우리 형제 가운데 4번 타자로서 나보다 아홉 살 아래다.
나주에서 10여 년 동안 미곡상을 하시던 아버님은 사업이 실패하자 광주 백운동 빈 땅을 세내어 블록공장을 차렸다. 아버님은 넷째를 조수로 지명했다.

넷째는 다니던 나주중학교를 중퇴하고 짐바리 자전거에 이불과 솥단지를 싣고 아버지 뒤를 따라 광주로 올라갔다.

블록 공장 조수로 몇 년을 수고한 넷째는 속성학원을 다녀 검정고시를 치르고 상고 야간부에 진학해서 또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한국은행 다음으로 어렵다는 은행에 합격했다.
온 가족이 춤을 추었다.

그토록 서럽게 공부하고 취직했던 넷째의 아들이 박사 학위를 받고 아울러 9월 1일자로 대기업 반도체 분야에 취직했다.

그 박사의 전공 분야가 뭐 ‘나노’, ‘자성(磁性)’, ‘소자(素子)’라던가. 반도체 분야 연구소에서 뭐 ‘에칭’인가를 연구하게 된다던가.

날마다 목포 바닷가에서 소주만 들이키는 나한테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조차 분간이 안 간다.
나는 인터넷에서 ‘에칭’을 검색해본다. -에칭-반도체 기판상에 어떠한 패턴(마스크)에 의해 필요한 소자를 배치하는 가공을 할 때, 필요 없는 부분을 부식 등으로 제거하는 기술. 에칭을 할 때 에칭하지 않고 남길 부분에는 부식되지 않는 레지스트를 칠하고 에칭을 한다.

넷째네 집은 되는 집안이다.

가운이 불같이 일어난다.

아비는 검정고시로, 은행지점장으로 한 세월을 마쳤지만, 아들은 박사까지 되었으니 무엇이 더 부러울 것인가.

어떤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은퇴하고 어떤 사람은 새 직장에서 새로 출발하기도 한다. 인생의 들고 남이 이처럼 쉴 새 없어서 낡은 사람은 끊임없이 새사람한테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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