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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 장군과 거북선-1
거북선 건조해 임진왜란 수군 승리의 주역이 되다
2015년 12월 09일 (수) 09:56:16 전남타임스 jn-times@hanmail.net

   
▲임준선 논설위원
거북선 또는 귀선(龜船)을 건조해 임진왜란 이순신의 승첩에 기여한 분이 나대용(羅大用, 1556~1612) 장군이다. 나대용 장군은 자가 시망이고, 체암(遞庵)은 별호이고, 관향은 금성이다.

당시 나주 거평면 오륜동(지금의 문평면)에서 태어났으니 우리 고장의 자랑이다.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 장군을 기리는 현창 사업은 미흡한 상황이다.

나대용 장군은 어떤 인물일까? 우선 임진왜란 때 왜적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북선이 어떤 배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북선은 조선 군함이었던 판옥선을 기본으로 판옥선의 갑판 위 바깥쪽 선체에 나무판으로 덮개를 씌운 배다. 그리고 이 나무판에는 송곳과 칼을 촘촘히 꽂아 적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선수에는 거북머리, 선미에는 꼬리를 세워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그 외에 선체 측면에 6개씩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하여 임진왜란 중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승리의 주역이 된 배이다. 포 사격과 충돌 작전으로 일본 수군을 격파하던 거북선은 일본 수군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새벽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모두 침몰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전후로 거북선의 건조와 전투, 그리고 승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나대용 장군이다.

나대용 장군은 부친 항과 모친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기국이 활달했다.

어려서부터 공부해서 과거를 보려 했으나, 투필하여 활 쏘는 기예와 전술을 익혔다.
훈련원 별시에 응시하여 병과에 발탁되었다.

충무공이 좌수영에 있을 때 나대용은 주부로서 집에 있다가 왜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알고 사촌 아우인 치용(致用)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 수군 방어의 계책을 말했다.

충무공 이순신이 청하기를 “이 사람은 문무가 구비하니 족히 맡겨 쓸 만하다.”고 평가했다.

충무공은 막하에 나대용 장군을 두었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 전에 거북선 세 척을 건조했다.

임진년 삼월에 발포권관의 자리가 비자 이순신이 천거하여 등용했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대용 장군은 유군장에 임명됐다. 옥포 해전, 당포 해전에서 앞장섰다. 당포에서 탄환을 맞았으나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승리를 얻었다.

임진년 시월에는 복병장으로 견내량에서 적을 생포하고 심문해 정보를 얻기도 했다. 나대용 장군은 항상 편지에 ‘사국(死國)-국가를 위해 죽음’이라고 적었다.

정유년 정월에 충무공이 중상모략을 입어 잡혀가 옥에 갇히자, 여러 사람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옥문 밖에서 울면서 항의의 뜻을 비쳤다.

정유 팔월에 원균이 패전하여 죽자 충무공이 삼도통제사로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 강진현감으로 임명된 나대용은 금구현령을 거쳐 1599년(선조 33)에는 능성현령을 지냈다.
그 해에는 전라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의 건조를 감독하는 감조(監造)를 맡기도 했다.

나대용은 125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한 판옥선이나 거북선과는 달리 42명의 격군만으로도 운항할 수 있는 창선을 개발했다.

명랑해전에도 참여하여 기적 같은 승리를 얻었다. 무술년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숨졌다. 이때도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곁을 지켰다.

고성 현령으로 있던 중 1601년(선조 34)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잇달아 부친상도 당하면서 6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 1606년(선조 39) 삼도통제사 이운룡을 통해 조정에 창선의 건조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창선을 시험적으로 건조하기로 하면서 조선차관(造船差官)으로 임명되었다.

광해군 때 곤양군수를 거쳐 남해현령으로 임명되었고, 쾌속선인 해추선을 개발했다. 이러한 공으로 1611년(광해군 3) 당상관으로 제수되었다.

경기수사로 승진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병으로 타계했다. 임금이 내린 삼지창과 청룡도가 전해온다.

수군장이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조선기술자로 평가되는 나대용 장군은 <국조보감>, <강호록>, <남해읍지>, <충무전서> 등에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나대용 장군은 임자년 정월 이십구일에 돌아가셨다. 나이 오십 칠세였다. 당시의 나주 거평면 마전동 선영에 묻혔고, 배는 정부인 이천 서씨이다.

지금의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보존되어 있는 그의 생가와 무덤은 전라남도기념물 26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8년에는 생가 인근에 그를 기리는 소충사(昭忠祠)라는 사당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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