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금
국제펜클럽회원·동화작가
고려의 토지제도는 겸병을 허락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토지를 권세가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배고픔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배고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 나라는 정녕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인가?”
정도전은 아낙의 서러운 눈물에도 도무지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백성들의 곤고한 삶을 목격하고 돌아온 정도전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생각 할 수 있었고 오랜 여행에서 자신이 부쩍 성장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하하하! 여섯 달이나 세상을 떠돌면서 얼마나 많은 세상공부를 하셨는가?”
“이런...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누가 보면 시골에서 농사짓는 백성이라 하겠소 그려.”
정몽주와 하륜은 정도전이 없는 사이에 배웠던 시와 학문을 논했지만 정도전의 머릿속에는 오직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의 모습만 가득했습니다.
“지금의 토지를 개혁하지 않으면 고려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섯 달 만에 개경으로 돌아온 정도전은 <균전론>을 짓기 시작 했습니다. 균전론은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농작 확대를 없애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기위한 제도였습니다.
“하하하.. 아직 나이 어린 자네가 균전론을 지었다는 말이 있어서 내 먼 길을 왔으니 그것을 좀 보여 주게나.”
이조년의 손자인 고려 명문가의 귀족답게 항상 오만한 모습이던 이인임이 어린 도전에게 허리까지 숙여가며 균전론을 보자고 했습니다.
“내가 균전론을 지은 것을 정몽주나 하륜정도의 친구들만 아는데 이 자가 어찌....”
정도전은 몹시 떨떠름했지만 워낙 벼슬도 높고 나이도 많은 이인임 인지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잠시 이것을 빌려 가겠네.”
“아, 아닙니다. 너무나 졸작이라...”
그러나 소매 안에 책을 넣고 뒤도 안보고 떠나는 이인임이었습니다. 정도전의 예상은 맞았습니다. 이인임이 그 책을 가지고 여기저기 필사를 해서 개경에서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아버지 정운경도 그 소문을 듣고 아들을 불러 앉혔습니다.
“나는 항상 네가 백성들을 걱정하는 보고 그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번일은 참으로 위험한 일을 했다.”
“아버님 제가 어리다고 국가의 잘못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아직 나이어린 네가 섣부르게 행동하여 화가 미칠까 염려되어 그러니 각별히 주의하라.”
과연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헌부에 고발을 했고 도전은 사헌부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집안에는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이런, 어린 녀석이 감히 국가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을 해?”
사헌부에서는 그가 아직 열여덟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너의 주장은 벼슬아치들의 토지를 뺏어서 백성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말이렸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네가 썼을 리가 없다. 누가 쓰라고 했느냐? 네 아비 정운경이냐, 네 스승이냐?”
“맹세코 소인이 그냥 썼습니다.”
“이런 놈을 보았나. 저놈이 바른대로 말 할 때 까지 매우 쳐라.”
“고려는 이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백성은 굶어죽고 국가는 점점 재정이 궁핍해집니다.”
정도는 곤장을 맞으면서도 소리를 질러가며 관리들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놈을 봤나. 어린놈이 뭘 안다고 나라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게냐?”
“저 어린놈이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매우 쳐라.”
“으아악...”
정도전은 사헌부의 혹독한 조사를 받고 열흘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모진 몰매에 엉덩이가 찢기고 살이 터졌지만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아버지 정운경이 형부상서 직에서 파직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네가 가슴 아파 할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무겁게 한마디 하셨을 뿐입니다. 그해 삼봉은 개경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최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아니 형님, 도전 형님 댁에 가신다면서 술이랑 안주까지 가져가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쌀은 왜가져 갑니까?”
“조용히 하시게, 삼봉이 결혼까지 해서 식구의 입이 늘었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나?”
하륜을 조용히 타이르던 정몽주가 멀리 정도전의 집을 가리킵니다.
“부친께서 그래도 한나라의 형부상서까지 하셨는데...”
“부친께서 워낙 청렴하셔서 가난이 대물림이 되고 있네 그려. 저 집 좀 보게”
“저 쓰러져가는 집이 도전 형님의 신혼집이라는 말씀인가요?”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집 텃밭에서 정도전의 아내가 푸성귀를 뜯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결혼 했지만 한 눈에 보아도 궁색한 옷차림이었습니다.
“아니, 나랏일을 보는 사람들이 어찌 이리 한가한 행차시오?”
방 안에서 책을 읽던 정도전이 막 방문을 열고 나오다 정몽주 일행을 맞이했습니다. 텃밭에 있던 아내도 그때서야 황급히 나와 손님을 맞이하였습니다.
행색은 몹시 초라하지만 반듯한 이마와 깊은 눈매가 초롱초롱 빛나는 얌전한 여인이었습니다.
“포은 형님께서 이렇게 오신 것을 보니 긴히 제게 이르실 말씀이 있으신 가 봅니다.”
정몽주와 하륜이 가지고 온 술을 따르며 도전이 묻습니다.
“삼봉, 언제까지 이렇게 초야에 묻혀있을 셈인가?”
“언젠가는 조정에 나아갈 날이 있겠지요.”
“삼봉 같은 인재가 이 나라에는 꼭 필요 해. 어서 과거를 보게나.”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의 일을 보고 있는 정몽주는 간곡한 어조로 권유를 했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정몽주, 하륜, 정도전 셋은 오랜만의 가슴을 터놓고 나라의 일들에 대해 의논을 했습니다.
“원나라는 망합니다.
반드시 주원장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킬 것입니다.”
정도전은 확신에 찬 어조로 원나라의 멸망을 예견했습니다.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히는 정도전은 이글이글한 눈빛이었습니다.
“형님, 그리만 되면 우리는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륜이 침묵을 깨고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렇게만 되면 이제 우리는 요동을 치고 우리의 옛 영토를 되찾아야지.”
정몽주는 말없이 정도전을 바라보며 새삼 그의 식견에 대해 감탄을 했습니다.
“삼봉. 이 나라는 삼봉 같은 이가 정말로 필요하니 반드시 이번 과거에 응시하시게나. 그래서 우리 함께 이 나라의 앞 일 을 논의하고 백성을 위하는 길을 찾아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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