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금
/ 국제펜클럽회원·동화작가
1360년 공민왕 9년 나라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권문세족들의 횡포와 부패는 그 도를 더해갔습니다. 거리에는 부모 잃은 고아와 거지가 넘쳐났고 굶어죽는 시체가 쌓여갔습니다.
“부인, 아무래도 전쟁이 날 것 같으니 우리 잠시 고향 단양으로 피난을 갔다 옵시다”
“아니 무슨 소리라도 들으셨는가요?”
서둘러 짐을 싸는 남편을 따라 보따리를 싸면서도 아내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습니다.“
“아니 짐을 바리바리 싸서 어딜 그렇게 가시는 겐가?”
“곧 전쟁이 납니다. 어서들 피하세요.”
“미쳤나. 전쟁은 무슨...”
사람들은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도전의 가족을 보며 웃었습니다.
“뭐라고? 도전이 피난을 가?”
정몽주와 하륜이 스승 이색을 찾아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예, 스승님.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정도전의 피난 소식을 듣고 비웃었지만 어려서부터 정도전을 가르쳤던 스승 이색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도전이 전쟁을 미리 예측했다는 말인가?”
사실 이 색도 나라의 되어가는 꼴과 주변 정세를 보면서 곧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하고는 있었지만 정도전처럼 이렇게까지 빠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 정확히 닷새 만에 홍건적의 침입해 왔습니다. 과연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홍건적이다. 홍건적이 나타났다.”
홍건적은 10만의 군사로 고려를 휩쓸었고 순식간에 서경이 함락되고 개경까지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개경을 버리고 복주로 파천을 했다”
“뭐라고? 임금이 백성들과 나라를 버렸어”
정도전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복주로 파천을 하면서 전국에 영을 내려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홍건적과 일전을 치루기 위해 장정들이 칼과 창을 들고 나섰습니다.
정도전이 피난을 간 단양에서도 장정들이 홍건적과 싸우기 위해 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바깥이 온통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가로이 책만 읽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당신이 나를 따라 살면서 너무 고생만 한 것 같으니 내 과거에 급제를 해서 당신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해 주어야겠소.”
“아니, 이 난리 통에 과거는 무슨 과거입니까?”
“전쟁은 잠시면 끝날 터이고 이제 나도 나라를 위해 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개경이 함락되었는데 어찌 전쟁이 곧 끝난다는 말씀 입니까?”
“한 시대를 도모할 대장부는 멀리서도 세상의 이치를 볼 수가 있는 법이라오. 하하하.”
과연 정도전의 말대로 홍건적은 많은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하고 얼마 후 1월 해가 바뀌자 전쟁은 끝났습니다. 정도전은 그해 개경으로 올라와 곧바로 성균시 시험을 앞두고 공부에 열을 올렸습니다.
“여보! 정말 장하십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내 최 씨가 열아홉의 나이로 성균시에 합격한 남편을 바라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두 당신이 가난한 살림을 불평 없이 잘 꾸려준 덕분이오.”
“이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서방님이 큰 꿈을 이루셔야지요.”
“고맙소. 내 반드시 그러 하리다.”
정몽주와 하륜의 간곡한 권유도 있었지만 정도전 스스로도 이제 마냥 초야에 묻혀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성균시에 응시를 해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첫아들을 본 정도전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허허... 이 놈 보오. 아비의 얼굴을 알아보는가 보오.”
까르르..까르르...방글방글 웃는 아들의 모습에 정도전이 도포를 벗지도 않고 간지럼을 태우며 즐거워하자 아내 최 씨가 거듭니다.
“요즘 너무 아들 보는 재미에 빠지셔서 책을 멀리 하셨습니다. 큰 뜻을 품으신 분이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이제 어서 책을 보셔야지요.”
과연 현명한 아내였습니다. 성균시에 합격은 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살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까지 딸린 몸으로 남편이 열심히 책을 볼 수 있도록 내조해 준 아내 덕분에 정도전은 이듬해 시월 진사시에 합격할 수 있었고 스물 두 살 되던 해 1364년 공민왕 12년에는 충주목의 사록에 임명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면이 많았는데 역시 벼슬길이 훤하게 열리는구만.”
“아! 왜, 어린 아이 때도 옆구리에 책을 끼고 살지 않았나, 그래. 또래 아이들하고는 모든면에서 달라도 많이 달랐지 ”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두고 보게. 이제 곧 왕을 모시게 될 것이니...”
해마다 점점 높아져가는 그의 벼슬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그가 고려의 왕실에서 앞으로 더 높은 관직에 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정도전이 이번에 왕의 비서직인 통례문지후 직을 맡았다는구먼. ”
“그것 봐, 내가 뭐라 그랬나,
“과연, 앞으로 벼슬길이 누구보다 탄탄대로겠어.”
공민왕의 곁에서 고려나라의  일들을 보면서 젊지만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한 마음과 해박한 지식으로 공민왕을 도와 명나라와의 친선외교를 펴는 일들을 은밀히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25세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함께 당한 그는 고향인 영주로 내려가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이제 그만 고향에서 올라와 과인을 도우라 ”
공민왕은 정도전이 곁에 없자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그에게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께 간곡히 아뢰어 부모님의 3년 시묘살이를 마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자식의 마땅한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당시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간 부모의 무덤 옆을 지키는 풍습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길게는 하지 않았는데 정도전은 달랐습니다.
“정도전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도 효성이 지극 했는데 돌아가셨어도 저렇게 한결같으니...”
“그러게 말이오. 복을 받을 것이야 ”
부모님의 3년 시묘살이가 끝나고 조정에 돌아온 정도전은 더욱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강직한 성품으로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토론하고 궁중의 예식에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던 그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망해가는 원나라보다는 한창 일어서고 있는 명나라와의 친선이 현명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펴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전남타임스 후원

저작권자 © 전남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