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은 정도전은 그 후로도 노인을 기다리고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출세하기 위해 세도가의 집이나 기웃거리고 관료로서 복지부동 하는 자로도 비쳐지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동료를 해 하는 자로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노인과의 대화 후로 도전은 더욱 글을 읽는데 최선을 다하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습니다. “아첨하는 자로나 패거리 문화를 만들어 권력을 남용 하는 자로 비추어 졌다면 얼마나 추한 모습인가?”
정도전은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노인과의 대화를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남겨야하겠다.’

정도전은 노인과의 대화중에서 얻은 교훈들을 느낌을 상세히 적어 기록에 남겼습니다. 나주 노인과의 대화가 있고 나서 그는 더욱 몸가짐과 행동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글을 쓰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도 이전보다 더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습니다.

정월이 지났지만 한 겨울밤 군불을 지피지 않은 방바닥은 말 할 수 없이 추웠습니다. 낮에 황연이 지나가면서 땔감을 보낸다 했을 때 고맙다며 받을 것을 미안한 마음에 아직 넉넉하다고 둘러 댄 것이 이토록 추운 겨울밤이 될 줄은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아하! 정말 춥도다.”

이른 저녁을 먹은 때문인지 긴 겨울밤은 배까지 고파오기 시작했고 보이는 모든 옷들까지 합쳐 감싼 몸이지만 그 추위는 실로 뼈 속까지 떨리는 것 같았습니다.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고통이 정녕 이런 것이었을까?”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이었습니다. 후덕한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으로 귀양살이 두해가 다 되도록 춥고 배고파 보지 않았는데 정월 추위에 한 밤을 떨며 보내보니 새록새록 가슴에 사무치는 인정들이었습니다.

“실로 저들이 자신들의 목숨 같은 먹을 것과 땔감으로 나를 섬겨주었구나. 혹시나 나를 살피느라 저들이 춥고 배고픈 밤을 보내지는 않았는지...”

하늘이 네 철을 나눠 놓으니
추위와 더위가 다 때가 있다네
정월이라 설도 이미 지나가고
입춘이 다가 오건만
추위는 아직도 위세를 부려
으스스 살갗에 스며드누나

이역에 묶여 있는 오랜 나그네
떨어진 옷에 헌 솜이 뭉쳤네
새벽닭이 좀처럼 울지 않으니
밤새도록 부질없이 슬퍼만 하네

“나의 새벽이 언제 올려는지 내가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포자기는 하지말자. 이곳 사람들의 인정이 나를 이처럼 살뜰히 보살피는데 내가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되지.”
“삼봉 어른이 요즘 통 밖에 나오시지를 않네 그려.”
“얼마나 외로우시겠어. 우리 집에서 호박떡이라도 해가지고 위로해 드리세.”
과연 언제 자신의 인생의 새벽이 오고 귀양이 풀릴지 몰라 스스로 자포자기의 심정이 들 때면 늘 나주사람 부곡민들의 정에 힘입어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슬프다 나의 도는 왜 이리 적막한고
술에 아니 빠지고 무엇 하리오
글 보다가 흩어진 책 그대로 두고
술 있으니 스스로 한 잔 기울이네
세상일 잊자는 것뿐만 아니라
깊이 품은 생각 재가 된지 이미 오래네

역모죄도 아니고 뇌물죄도 아닌 죄는 아무리 길어도 대개 1년 조금 넘으면 풀려나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에게만은 예외였습니다. 어쩔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이 밀려 왔습니다.
“삼봉 어르신, 서울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거.. 저희 같은 천한 것들이 먹는 보리 개떡 입니다요.

딸내미가 보리를 캐왔길레... 잡수실 만 하실지 모르겠습니다요.”

“개경에서도 이맘때면 보리를 뜯어다 떡을 해먹었는데, 감사합니다.”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들고 보니 낯익은 아내의 글이었습니다.

“당신은 죽이 끓든 밥이 끓던 간에 열심히 공부만 하기에 언젠가는 입신양명 하리라 믿었는데 죄를 짓고 유배에 가 계십니까? 끝내는 나랏법에 저촉이 되어 이름은 더럽혀지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풍토병에나 걸린다면 어찌 합니까? 형제들은 나가쓰러지고 가문이 망하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

아내의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던 정도전의 눈자위가 벌개 집니다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 구름처럼 흩어졌소. 그 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졌지 은혜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요.” 권력과 돈이 있을 때는 자신을 칭송하며 벌떼들처럼 달려들었던 많은 친구들이 이제는 오히려 비방하며 조롱하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 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 서가 아닐 것 이오.

 당신은 집을 걱정하고 나는 나라를 걱정하는 것 외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소.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을 근심 하겠소.”
몇 자를 더 적을까 하다가 더 말하지 않아도 지혜로운 아내는 정도전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 주리라 믿었습니다.

“여보, 고생이 되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추은 겨울이 가면 반드시 봄이 오듯이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귀양살이였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이 조정의 벼슬길을 바라보지 않고 백성들만을 바라보자 끝 모를 절망도 조금씩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전남타임스 후원

저작권자 © 전남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