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골과 관련이 깊은 나주 완사천
▲왕골과 관련이 깊은 나주 완사천

왕골(Cyperus exaltatus var. iwasakii.)은 나주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식물이다.

1년생 내지 2년생 초본으로 돗자리를 엮는 데 많이 사용되는 식물이다.

왕굴, 왕초, 완초(莞草)로도 불리는 이 식물의 이름이 왕골로 된 데는 나주 완사천, 왕건, 장화황후, 혜종 그리고 돗자리와 관련이 있다.

고려사88, ‘열전’1 ‘후비1’ 장화왕후 오씨에 의하면 왕골과 나주의 인연은 왕건과 장화왕후에서 비롯된다.

태조(太祖, 877-943)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배를 정박시키고 시냇물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서려 있었다.

그곳으로 가 보니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왕후의 가문이 미천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돗자리에 사정하였는데, 왕후가 즉시 이를 자신의 몸에 집어넣어 마침내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혜종(惠宗, 912-945)이다.

혜종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혜종을 주름살 임금이라 불렀다.”

고려사 장화왕후 오씨에는 이처럼 돗자리(草席)가 나오는데, 돗자리(草席)가 왕의 얼굴에 골을 지게 했다고 해서 '왕골(王骨) 돗자리'라 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왕골이라는 식물의 이름 또한 왕의 얼굴에 골(주름)을 만든 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돗자리는 왕골 또는 골풀로 만드는데, 꽃무늬 문양이 있는 것을 화문석이라 한다.

화문석의 사용 역사는 삼국사기를 통해 볼 때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주로 왕실에서 사용했으며, 사직신(社稷神)의 신위에 깔았다.

그 이용문화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돗자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에는 나주와의 인연이 또다시 부각되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5년 갑인(1494)913(무술)의 기록에는 김자원(金子猿)은 석장(席匠)의 아들로서 지위가 당상(堂上)에 이르렀는데, 일가붙이를 돌보지 않고 여러모로 경영하고 구하여 그 나주성(羅州城) 안팎의 집은 모두 본주(本州)에서 지었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김자원은 연산군 때 내시로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전색(承傳色)이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폭군의 최측근으로 역사 속에 기록된 인물이다.

'연산군이 사치와 방탕만을 일삼는 동안 국가 정사는 오로지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져 있었다.'(국사편찬위, 한국사,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1970년대 나주의 돗자리 공장(사진제공 윤여정)
▲1970년대 나주의 돗자리 공장(사진제공 윤여정)

내시로 권세를 누렸던 김자원은 나주 석장(席匠)의 아들로 태어났다.

석장은 돗자리를 짜는 장인(匠人)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석장(자리를 제조하는 사람)은 당시 지방관청에 속해 있었는데, 김자원은 나주에 사는 석장의 아들이었으므로 조선 시대에 나주에는 돗자리를 짜는 석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골이라는 이름의 유래지였던 나주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전국 최대 화문석 산지로 변모한다.

나주 영산포를 중심으로 돗자리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다미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17년에 나주 영산포 관내에 일본인들의 가구 수는 520호였는데, 일본인들도 다다미를 생산하면서 영산포는 최대 돗자리 산지가 되었다.

나주에서 돗자리 생산은 꾸준히 증가해 1972년에는 1백 만장의 돗자리가 생산되었다.

당시 나주는 국내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한 최대 돗자리 산지였다.

나주에서 생산된 자리는 꽃, , 수북강녕 등 10여 종의 문양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꽃문양의 자리인 꽃자리 즉, 화문석(花紋席)이 대표적이었다.

나주는 왕골돗자리의 유래지인 것과 함께 화문석의 최대 산지였던 문화를 갖고 있다.

 

/ (재)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허북구 국장/ (재)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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