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를 다해 의병활동 전개한 전북지역 의병장들

한말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과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 일어선 의병들은 한반도 어느 곳도 예외 없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에서 보는 것처럼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악랄하고 폭력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일본의 진압에 맞선 의병들의 투쟁을 항일항쟁을 뛰어넘어 항일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말 남도의병은 가장 치열하게, 끝까지 독립전쟁을 죽음까지 불사하고 전개했다.

남도의병에서 현재의 행정구역인 전북의병들도 참으로 많다.

어려운 시기마다 국난 극복과 자주 독립을 중요성을 강조하는 민족정기의 정립을 외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런데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에서 한일간의 외교관계는 매우 위태하게 전개하는 시대이다.

과거의 사고와 반성없이 미래를 위한 장밋빛 희망을 내세우는 윤석열 정부는 일본에게 저자세 굴욕외교로 시민들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대위 변제,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방류 문제 등은 국가의 자존심은 물론이고 해상 오염과 해산물의 먹거리까지 무너뜨리는 일임에도 정부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교 관계이며, 국제 질서에서도 신뢰를 실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심히 불안과 걱정이 앞선다.

다시 의로움과 당당하게 나선 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억하는 것은 무너진 민족정기와 애국애족 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처절함이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위기의 상황에서 의연하게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어서 의병항쟁 활동을 전개했던 이름없는 의병들을 애써 기억하는 것은 나라의 안위와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깨어 있어야 자존할 수 있고, 함께 해야 자주적인 나라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임진전쟁에서 임진의병을 적극 참여했고, 그 의병정신이 면면히 내려와서 한말의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의병항쟁에 참여했던 전북의 동부지역의 의병들을 만나보자.

순창, 남원, 임실, 무주 지역으로 산세가 험악하고 교통이 불편했던 곳이지만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무엇이 그렇게 의병항쟁을 가능하게 했을까.

▲소충사[28의사와 이석용] (전북 임실군 성수면)
▲소충사[28의사와 이석용] (전북 임실군 성수면)

양인숙 의진에서 의병활동 전개한 김기중

김기중(1870~1910) 의병장은 전북 남원 사람이다. 1907년 전북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 양인숙의 부하가 되어 남원군 견소곡면 선암 이장 김영보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190898일 임실군 덕치면 암리에서 한국인 순사 박경홍을 처단했다.

190911월 붙잡혀 112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191011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교수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신보현 의진에서 의병활동 전개한 김선여

김선여(1875~1910) 의병장은 전북 순창 사람이다. 1908420일부터 190933일까지 의병활동을 했다.

신보현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부대를 이끌고 순창·정읍·태인, 전남 장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093월경 신보현 의진에서 독립한 그는 전북 순창군 백방산에서 40여 명의 의병들을 모아 의진을 편성, 의병장이 됐다.

1910317일 광주지방재판소의 교수형에 공소했으나, 191042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 의진에서 의병활동 전개한 김필수

김필수(1875~1913) 의병장은 1908년 음 9월부터 191212월까지 전북 진안·장수·임실 등지에서 이석용 의진에 참여했다.

1908년 음력 96일 여운서와 함께 일본 헌병의 밀정 김관일을 처단했고, 1911414일 이석용 외 4명과 함께 김제군 일서면의 공전영수원이 거둔 세금 64원을 모금했다.

김필수는 19121122일 밤 장수군 진전면사무소를 기습하여 공전영수원·면서기·전 면장 등으로부터 세금 등을 모집했다.

또한 이석용 등과 함께 19121217일 임실군 남면 야당리의 공전영수원 강정수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

1913329일 대국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526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동지 탈옥시키고 자진 순사한 박춘실

박춘실(1875~1914) 의병장은 전북 장수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을사의병으로 궐기했다.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군과 접전했다.

1906년 가을 문태서 의진과 연합해 일본군을 습격해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교전했다.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3월까지 5년동안 60여 차례 체포되었다.

190958일 박춘실은 적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었다.

19097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 후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자 벽을 부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키고 본인은 자진 순사했다.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최산홍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양경학

양경학(1883~1910) 의병장은 전북 순창 사람이다.

1909년 음력 215일 최산흥 의병부대에서 항전했다.

순창군 무림면 문치리와 무림면 장암리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930일 순창군 인화면 중산리에서 밀정 이용안을 단죄하다 붙잡혔다.

이듬해 12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항고했으나 312일 대구공소원과 4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교수형에 순국했다.

1990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대구감옥에서 교관을 살해하고 순국한 여규목

여규목(1888~1918) 의병장은 전북 임실 출신의 의사였다.

그는 19069월 전북 진안 마이산에서 이석용을 추대, 의병장으로 하고 동지를 모아 동맹단을 결성하고, 자신은 중군장으로 교전했다.

임실읍과 장수읍을 공격했다.

19085월부터 12월까지 8차례 부호들의 금품을 모집하여 군자금에 충당했다.

1908년 말 체포되어 190935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의 교수형 선고에 대구공소원에 공소했으나 427일 기각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수감 중 법정공판 출두할 때 교관의 칼을 빼앗아 간수 3명을 살해하고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순창의병항일의적비(전북 순창군 순창읍)
▲순창의병항일의적비(전북 순창군 순창읍)

진안에서 기병한 의병대장 이석용

이석용(1877~1914) 의병장은 전북 임실 출신이다. 이학자, 이학사로 불리기도 했다. 1907826일 진안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의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항일 사상을 고취했다.

남원·전주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9089월 임실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의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141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는데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공소했으나 기각되어 19144437세로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칠연의총(전북 무주군 안성면)
▲칠연의총(전북 무주군 안성면)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2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군자금 모금과 일본인 처단한 임익상

임익상(1887~1910) 의병장은 전북 무주 사람이다. 1909년 음력 719일 박화윤 외 5명과 함께 전북 장수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동년 1010일에는 박화윤·이사필·이달서·이문재·서학삼 등과 함께 경남 안의군 일대에서 일본인 벌목공 궁곡진오랑 외 수명이 거주하는 판자촌을 습격하여 1명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31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아 공소했으나 19105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했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석용 의진에서 참모 활동 정세창

정세창(?~1912) 의병장은 19088월 전북 진안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 임실 출신의 유생 이석용 의진에서 참모로 활동했다.

19089월 임실전투에서 패한 이석용이 의병진을 해산한 뒤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9099월 일본군의 남한대토벌 작전을 피해 충청북도로 이동했다.

191110월 청주에서 김수옥과 김학준을 동지로 영입하여 태인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했다.

1912212일 태인분견소 헌병에게 체포되어 19125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717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했다.

2009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항쟁 전개한 정일국

정일국(1882~1909) 의병장은 전북 남원 사람이다.

19067월 남원에서 기의하여 1908년 음력 2월까지 40~5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해 구례·담양, 경남 거창·하동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4월경에는 순창·태인과 음력 7월에는 고부 및 순창에서 활약하면서 28일에는 90여 명을 인솔하고 순창 읍내 우편취급소를 공격, 일인 2명을 처단했다.

동년 음력 8월에는 구례 순사주재소를 공격했고 음력 9월에도 경남 안의군청을 공격했다.

19093월 순창·태인 등에서 활약하다 체포되어 10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아 순국했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구하겠는가

민족정기!

그 어느 시대부터 중요한 화두이다. 모름지기 민족정기란 한민족의 공동의지로서의 바르고 큰 기풍이며 민족의 얼이 깃든 바르고 큰 기운이다. 그러면 우리민족의 공동의지는 무엇이며, 민족의 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존과 자주, 그리고 평화와 공동체가 보장받는 나라의 정신적 가치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의병장과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받쳤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구하겠는가?’

▲김남철 이사/나주학회
▲김남철 이사/나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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