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금
국제펜클럽회원·동화작가
“고려의 명운이 다 했음인가? 아니면 이제 아버님의 때가 되었음일까?”

아버지 이성계가 은행나무에 대해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이방원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말을 달렸습니다.
“이랴... 이랴...어서가자.”

남이 보면 별것도 아닌 은행나무일 수 있지만 이성계에게 그 은행나무는 자신의 원대한 천년의 꿈이 깃든 나무였습니다.

아들 방원을 함주 벽란도로 보낸 이성계는 많은 물품들을 준비하여 나주로 향했습니다.
“의복과 양식을 좀 더 풍성하게하고 무엇보다 서책과 지필묵 등을 알뜰히 챙기라.”

말을 달려 나주 땅에 도착하고 보니 정도전이 나주의 선비들과 함께 정중하게 예를 다해 이성계를 맞이했습니다.

“장군! 낙마하셔서 고생이 심하시다 들었사온데 이리 행차를 하셨습니까?
“어서 오시옵소서”

반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또 나주 사람들의 깍듯한 예의범절도 개경에 견주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반듯하고 고상하여 이성계는 탄복을 하였습니다.
정공! 참으로 그대가 자랑하던 나주 사람들의 진면목을 내 이렇게 직접 확인 하는구려”

“이제 곧 장군의 백성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목소리를 낮추는 정도전이었지만 그 소리와 의미는 더욱 또렷히 전달되었습니다.
“귀하신 장군의 왕림을 관헌에서 모시지 못해 송구 하옵니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공적 임무를 띄고 온 것이 아니지 않소. 그냥 벗에게 다니러 왔으니 괘념치 마오.”

나주목사 여칭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도 천하의 이성계 장군에게 공식적인 예를 표하지 못함을 송구스러워 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밤이 이슥해서야 비로소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군! 절 받으시지요.”
“아니, 정공 새삼스레 절은 무슨 절...”
“아닙니다.

이제부터 장군께서는 저의 주군 이십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유일한 주인이요 더불어 왕으로 모신다는 뜻이 포함된 절을 올렸습니다.
“장군...”

“정공, 내 이 순간을 결코 잊지 않으리다.”
천금 같은 깊은 의미가 담긴 장중한 몸짓의 절은 신하된 자가 임금께 드리는 절이었습니다.
“이제 때가 다 된 듯합니다.”

“정공께서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초를 많이 겪으셨소.”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대업을 앞두시고 꼭 한번은 오셔야했던 나주 땅을 밟으시니 참으로 의미가 있다 싶습니다.

오히려 저의 귀양이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그대의 말처럼 이 땅 나주는 오랜 역사를 품은 땅임에도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사람들은 기품과 절도가 있소. 과연 자신의 삶의 터전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오.”
“옳습니다.

왕건대왕께서 고려를 건국 하신 이 후 이곳은 지금까지 명실상부한 호남 제일의 지위를 유지한 고을이었습니다.”

“현종께서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험준한 노령산맥을 넘어 굳이 나주 땅으로 몽진을 오신 이유를 알 것 같소.”
“그렇습니다.

현종께서 지방제도를 완비하시면서 12목을 8목으로 조정 할 때 승주와 전주를 목에서 제외시킨 후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나주만 목으로 남게 된 중심지입니다.”

“참으로 너른 평야와 바다 같은 품으로 역사를 품어온 고을임이 분명하오.”
“말씀이 나온 김에 내일 저와 함께 태조 왕건 대왕님의 발자취와 이 땅 나주 고을 곳곳을 한번 둘러보심이 어떠시겠습니까?”

“함주에 간 방원이도 내일쯤은 올 터이니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을 듯 싶소이다.”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이방원이 도착했습니다.
“소자 문안드립니다.”

“오냐, 고생이 많았다. 은행나무는 ?”
“예, 아버님. 지체하지 말고 달려오라 했으니 곧 당도 할 것입니다.”

며칠간 밤낮을 달려 온 이방원은 은행나무가 행여 상할세라 오는 내내 그 곁을 함께 지키며 보다 빨리 올수 있도록 독려했다고 했습니다.

“소자 은행나무 곁을 지키며 오다가 나주 땅으로 넘어서면서 혼자 말을 달려 왔습니다.”
“참으로 잘하였다.”

점심때쯤 은행나무가 당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은행나무가 도착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 그럼 곧 도착 하겠구나. 어서 향교로 가자.”

지난밤, 과연 어디에 이 은행나무를 심을 것인가 의논하다가 정도전과 이성계 두 사람 모두 향교가 제일 적격이라는데 결론을 모으고 흐뭇했던 것입니다.

“천년의 사직을 이어갈 이 땅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할 인재들이 이곳 향교에서 배출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라...”

“참으로 시기도 적절합니다. 곧 대업을 이루실 것인데 이렇게 천년 은행나무라니...”
정도전의 말에 이성계도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하하하... 그 나무가 보통의 나무이겠소? 다름 아닌 정공과 내가 처음만나 대업의 꿈을 꾸며 심은 나무였는데 이리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소.”

“제 나이 마흔둘 우왕 아홉 해 째의 때의 일입니다. 우왕과 창왕은 이미 가신지 오래... 이제 제 나이 쉰이고 현재의 공양왕께서 3년 째 이시니 벌써 8년여의 세월이 되었습니다.”
“그대와 대업의 꿈을 꾼 지 8년..., 꿈같이 흐른 세월이었구려.”

“저는 참으로 긴 세월이었습니다만 장군께서도 역시 멀리 보시면서 꿈을 키워오셨군요”
“기다림이 어찌 지루하지 않았을까, 다만 백성들이 받을 충격을 줄이고 싶은 욕심이었소”

“이성계, 당신은 참으로 한나라를 이끌어갈 큰 재목이 분명합니다. 고려백성의 큰 복이요.”
정도전은 이성계의 깊은 뜻이 담긴 말에 말없이 고개를 숙여 최대한의 예를 표했습니다.

오후 늦게 당도한 나무는 생각 보다 많이 자라지는 않아서 옮겨심기에 적당했습니다. “어디가 좋겠소?”
향교의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던 이성계와 정몽주는 양지바른 향교의 남쪽 큰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함주에서 가져온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내 함주에 있을 때, 명나라를 오가던 묘목상이 공자의 고향에서 가지고 온 은행나무라고 한말이 이제야 생각이 나오. 그때는 깊이 새겨듣지 아니했으나 과연 그 말이 진실이라면 이 은행나무를 공자의 사상을 가르치는 이 곳 향교에 심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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