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성·정체성 함량미달→나주 평화의소녀상←지역성·작가의 창작성 인정해야

지난해 나주시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나주 평화의소녀상이 돌연 예술성·정체성 논란에 휩싸였다.“전혀 다른 소녀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금모금 포스터의 이미지와 설치된 작품이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작가는 “일제식민지 당시 16~18세의 소녀이미지에 나주지역의 특성을 살려 나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광춘 여사의 댕기머리를 형상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전남타임스는 활발한 논쟁의 장이 되고 있는 ‘나주시민소통사랑방’ 밴드에 게재된 논쟁의 글을 작성자들의 동의를 얻어 지상토론으로 구성하였다.<편집자주>

나주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논란에 대해서

/김경학
화가·나주문화예술소통창작소
나주 평화의 소녀상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소녀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바위좌대의 의자에 새겨진 강아지풀은 조국산하 지천에 널려있는 잡초이며 일제 강점기 모진 풍파를 겪고, 견뎌낸 당시 민중들과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故 정서운 할머니, 국내최초 위안부 피해 증언. 2003년 5월 마지막 증언) 위안부 소녀들의 의지를 형상화 했습니다.

머리의 형상에 대한 논란

머리의 형상을 댕기머리로 표현한 이유는 기존 소녀상의 단발머리가 다소 어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단발머리를 한 ‘소녀’의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전형 화된 위안부 피해자상의 모델입니다.

기존의 소녀상이 거칠게 잘려진 ‘단발머리’로 표현된 이유는 낳아주신 부모와 자란 고향이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억지로 단절된 모습을 표현하고자 위함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조선 소녀의 머리카락은 댕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전해지는 자료들도 대다수입니다. 한편, 몇몇 자료들에서는 위안소에 가면 ‘머리를 잘랐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당시 위안부 여성의 머리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단발머리 혹은 댕기머리로 표현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소녀의 눈동자와 보따리, 어깨 위 날개

소녀의 ‘눈’ 또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눈은 우리 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위 중에 하나입니다.

소녀의 눈은 억울해 보이기도 하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듯 보이기도 하며, 정면을 반듯하게 응시하는 듯하나 어딘가 모르게 애틋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눈에 담겨 있습니다. 임정임 작가는 나주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많은 시민들이 이 눈을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두 손에 꼭 쥔 보따리와 오른쪽 어깨에 달린 날개 또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조형물(보따리, 날개)부차적 이미지는 죽어서가 아닌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소녀들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개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반성과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입니다.

한쪽 날개로는 하늘을 날 수 없듯, 우리 정부의 단호한 결단과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반성이 없다면 소녀의 날개는 언제까지나 반쪽짜리 날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며, 문제가 해결될 때가지 지치지 않고 문제제기 해야 함을 임정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될 수 있습니다.

나주에 세워진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소녀상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두상과 어깨모양, 손과 발, 헤어스타일까지 모두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주는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 오로지 ‘나주’만의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것으로 합의했고, 이에 따라 소녀상 작품을 만든 작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단발머리를 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을, 하나의 정형화된 ‘평화의 소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된 소녀상의 모습이기도 했거니와, 전국 각지에 세워진 소녀상 또한 기존의 소녀상을 그대로 설치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품제작 시작 전부터 임정임 작가는 그것이 반드시 수학문제의 답안처럼 단 하나의 ‘온전한 소녀상’은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알고 있었습니다.

단발머리를 한 ‘소녀’의 모습만이 온전한 피해자상을 대표하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변화에 앞장서야 합니다.

꼭 조각 작품이 아니더라도, 영화·드라마·그림·사진 등의 창작물에는 그것을 만든 제작자의 ‘주관’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제작자는 하나의 창작물에 이러한 ‘주관’을 투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것은 곧 ‘책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각각의 ‘주관’이 들어간 예술작품은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같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작가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거니와, 약자인 여성과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문제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운성·김서경 작가와 통화

임정임 작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주위안부 소녀상에 대한 작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임정임 작가는 자료를 뒤지고 전국에 세워진 위안부소녀상을 검토하며 살아 남은자로서 역사적 채무를 갚을 수 있다는 기쁨과 영광으로 작품제작을 하였습니다.(실제로, 작품을 제작하는 도중에 소녀상의 최초 작가인 김운성 작가와 전화통화를 하였으며 김운성 작가 역시 자신들이 만든 기존의 소녀상이 아닌 각 지역의 작가 특히 나주에서는 임정임 선생 개인의 소녀상인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기존 작품과 당시 시안을 통한 작품에 대한 차별지점과 해석의 차이에 대해서도 길게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습니다. 이 통화는 저도 들었고 일찍이 민미협 활동으로 저와 친분이 있던 김운성 작가인지라 저 하고도 전화 통화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소녀상건립추진위에 의견이 개진되었고 결국 임정임 작가 개인의 작품이 제작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후 추진위에서는 임정임 작가의 작업과정에 대해 직접 작업실에 방문하여 3번의 실사과정을 거쳤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작된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임정임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놓지 않고 추진위와 합의 된 내용을 중심으로 주관화된 예술적 감성을 표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과정과 많은 사람들의 충고과 염려 속에 나주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나 임정임 작가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할 목적으로 임한 적은 기필코 단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어렵고, 버거운 과정이었습니다.

작가로써 추구해왔던 표현방식과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고민 사이의 괴리,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는 시민으로서의 의무, 그리고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미해결상태로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해결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마흔 다섯 분의 위안부 피해 생존 할머님들께서 일본정부와 이 조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하는데 더욱 몸과 마음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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