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경희대 대학원 문학박사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추사 김정희 선생 추모 전국휘호대
회 심사위원, 대한민국 동양서예대전
초대작가
-현 국제펜 한국본부 ‘펜문학’ 편
집인 및 간행위원장
유머펀치
안성현(安聖絃, 1920~2006) 작곡가는 남평면 교촌리 119번지가 본적지이며 1920년 7월 30일 남평면 동사리 217번지에서 태어났다.

남평은 너른 평야를 품고 흐르는 지석강(일명, 드들강)에서 들노래나 노동요 등 노래소리와 중요무형 문화제 제33호로 지정된 고싸움놀이 등 노래와 놀이가 끊이지 않던 풍류의 고장이었다.

안성현은 출생부터 이처럼 감수성이 풍부한 지역에서 태어나 사춘기를 남도 평야의 풍류를 익히며 성장했을 것이다.

또한 드들이의 전설이 흐르는 드들강 둔치의 금모래톱이나 뛰놀던 낙락장송 소나무 숲에서‘ 엄마야 누나야~’의 가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지 모른다.

안성현은 1934년 남평공립보통학교를 21회(8세 취학연령보다 1년 늦은 9세인 1928년에 입학한 것으로 보임)로 졸업하였고 함흥으로 이주하기까지에는 이름이‘ 안국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국현’을‘ 안성현’으로 개명한 일은 이전의 기록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함흥 이후가 분명하고 자신이 전공하여 나아갈 분야를 음악으로 확정했다는 의도를 담아 개명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936년 말 아버지 안기옥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한 안성현은 함흥중학교를 거쳐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도호음악학교 東邦音樂學校 성악부(테너)를 마쳤다.

아마 이때까지가 1937-1943년까지인 듯 하고 중학교 5년에 대학 2년의 세월이 걸쳐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성현이 다닌 도호음악학교는 1938년에 설립된 2년제 음악학교로 개교 당시에는 서양음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본 유일의 음악학교였으며 음악 관련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안성현은 1944년부터 1947년 상반기까지 전남여중, 광주사범(현 광주교대), 조선대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나 강사로 활동하였고 이 해에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이고 3살 연하인 전남 장흥군 장평면의 규수 성동월과 결혼했다.

안성현과 성동월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안우삼은 1945년생으로 광주에서 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서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시절에는 약대 학생회장을 했었고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했지만 건강이 좋지를 않아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안성현의 딸 안경애는 1949년생으로 두, 세살 때 아버지와 헤어져서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해남출신인 재일동포와 결혼하여 현재 일본 이바라기 겐시에 살고 있다.

광주에서 안성현이 목포의 항도여자중학교로 옮겨간 시기는 1947년 가을(9월)이고 이 학교 교장이던 조희관선생의 사택에서 침식을 해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때는 이 해 9월 30일이었다.

항도여중에 부임한 안성현은 곧바로 합창단을 구성하여 각종 예술제에 올렸고 전국 합창 콘테스트에서 준우승 등의 실력을 보여 목포사회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안성현을 항도여중으로‘ 스카웃’한 것은 당시 광주사범학교 국어교사이며 시인, 수필가로도 활동하던 조희관이 1947년 7월 20일, 항도여중의 교장에 부임하면서 항도여중을 최고의 명문으로 만들겠다는 의도 밑에 실력과 인품이 좋은 교사들을 전국에서 끌어들였는데 일대에 평판이 자자한 안성현을 스카웃 형식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부용산’의 작곡가 안성현‘, 출생’에서 일본유학까지 …김종 시인의 안성현 탐구‘ 영감과 열정, 그리고 자유예술혼의 시간’ 안성현과 단짝을 이룬 박기동은 1948년 봄에 항도여중으로 부임했다.

박기동은 1917년생으로 일본 관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해방 전후 벌교남초등학교- 벌교중학교-순천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순천사범 재직 당시 박기동은 이른바‘ 남조선교육자협회’ 사건에 휘말려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니다가 벌교남초교 시절의 동료 교사 소개로 1948년 초(1월)에
목포에서 조희관 교장을 만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한 석 달만 있다가 떠나야지 마음먹고 1948년 2월 1일 부임했는데 1949년 9월 30일까지 근무하여 결과적으로 1년 8개월을 눌러앉았고, 자기 인생을 바꾸어버린 안성현을 운명적으
로 만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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