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고등학생 신분으로 계엄군에 맞서 끝까지 싸워
오직 가족·이웃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역사회 위해 일할 터”

5.18민주유공자 나주동지회 제5대 김기광 회장
1. 5·18민주유공자나주동지회 회장을 맡게 된 소감 한 말씀...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5·18민중항쟁은 과거의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당시에 가장 젊은 나이였던 항쟁의 당사자들은 이제는 초로의 나이로 접어든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이미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도 상당히 많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회원들에 대한 처우와 복지문제도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금년에는 5·18민중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며 여러 가지 산적한 현안들이 상당히 많은 과제를 남겨주고 있고 옛 전남도청별관 보존문제 및 5월 제 단체 통합 등의 문제들은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시급한 일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5·18민주유공자나주동지회장의 직책을 맡다보니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지만, 지난 30년 전에 오직 정의와 명예를 위하여 목숨 걸고 불의에 대항하였듯이 경륜 높은 전임 회장님들과 120여 나주동지회원님들의 성원과 격려를 등에 업고 정의와 명예를 위하여 성실하고 모범된 보훈단체장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할 것입니다.

2. 올해 30주년을 맞이하는 5·18민중항쟁, 김 회장 나름대로 정리한다면?

   =5·18민중항쟁은 우리민족의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소산입니다. 조선말기의 동학농민운동, 일제 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항쟁이며 깨어있는 시민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 잡은 사건입니다.
또한 5·18민중항쟁은 불법적인 권력과 무력에 죽음으로 저항한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이며 당시의 수준 높은 자치와 나눔의 공동체정신은 결국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하였지만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정치 세력을 심판하였고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 항쟁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된 사건입니다.  
 

3. 5·18민주유공자나주동지회 결성배경과 현재 활동 회원 현황은?

   =1986년 7월 8일, 5·18민중항쟁에 참여하여 부상을 당하였거나, 구속수감 되어 부상을 입은 사람들과 항쟁 당시에 돌아가신 분들의 유족 등 132명의 나주에 거주하고 있는 동지들이 고(故) 김영창 초대회장을 중심으로 5·18민중항쟁당시의 정신을 살리자는 취지로 의기투합하여  5·18민중항쟁나주동지회라는 명칭으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시절 하에서 5·18관련자들은 매일 사찰과 감시를 받았었고 서로 뭉쳐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창립 초기에는 온갖 방해로 어려움도 많았지만 5·18당시에 죽거나 다쳤던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명예회복, 학살 원흉처벌 등을 위하여 서울 상경 투쟁, 분신, 국회의사당 점거투쟁, 연희동 기습시위 등 정말 많은 시련을 겪고서야 김영삼 정부시절에 5·18광주민주화운동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5·18민중항쟁이 어느 정도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2대 김기석 회장이 취임하고 2002년도 국민의정부 시절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5·18민주유공자로 등록이 되었고 5·18민중항쟁나주동지회는 5·18민주유공자나주동지회라는 명칭으로 개칭하였으며 2006년도부터는 3, 4대 고귀석 회장을 거쳐 올해 2010년도에는 120여명의 회원과 함께 제5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4. 김 회장은 5·18 당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저는 당시에 나주한독공업고등학교(현 나주공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철부지였습니다.
그 날은 사월 초파일(5월 21일)이었습니다. 세지 동창에 있는 친구집에 전날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버스가 다니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창에서 택시를 타고 죽동으로 나왔는데 버스는 다니지 않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광주고속을 탄 시위대들이 우리 앞에 서더니 “젊은 사람들이 뭐하는 거요? 지금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다 죽이고 있는데... 빨리 차에 타서 같이 올라갑시다”라는 말을 듣고 “정말로 큰일 났구나”하는 생각에 서둘러 그 버스를 탄 것이 저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던 것입니다.
그 후 나주금성파출소 예비군 대대본부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하고 광주로 올라가 광주교도소 전투, 지원동 전투, 화순 너릿재 터널에서 계엄군들과 교전을 하고 노동청 등을 사수하다가 기동순찰대로 편성이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26일 오후에는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선서를 하고 기동타격대 5조로 편성이 되어 조장의 책임을 맡아 최후의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밤에 순찰을 하였지만 거짓말처럼 태풍전야같이 너무나도 조용한 밤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는 징후였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계엄군의 진압당시 여러 동지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당하였지만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체포되어 당시 상무대 영창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무대 영창에 있는 동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무수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시켜 내란죄명으로 재판을 받아 약6개월 동안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습니다.
석방 된 후 약 7~8년 동안 매일 사찰과 감시를 받아야 했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는 생활도 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님께서는 계엄군의 진압이 끝난 후 내가 나타나지 않자 죽은 줄 알고 내 시체를 찾으러 광주까지 걸어서 다니시고 망월동의 시체더미를 헤집고 다니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내가 정말 엄청난 불효를 저질렀구나” 하는 회한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어머니는 얼마 사시지도 못하고 아까운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고 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돌아가신 것 같아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저도 아직까지 그 당시에 받은 고문과 구타의 후유증으로 고생은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젊다는 패기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5. 오는 6월 지방선거에 시의원 후보로 출마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지금의 나주사회는 정말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비난과 비방이 난무하고 있고 갈등과 분열로 치닫고 있으며 사회지도층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방관과 무관심과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적어도 현재의 나주사회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너무도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실정에 있는 나주사회에서 무언가 할 일을 찾아내는 것이 30년 전에 분연히 총을 들고 죽음으로 불의에 대항했던 참다운 5·18민중항쟁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가 아닌 우리라는 생각과 하나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나주시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책임을 느끼며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제발 올해부터라도 제대로 돌아가는 나주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정의감과 따뜻한 포용력을 가진 그 누군가가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나주사회를 바로 잡아야 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저도 이제부터는 행동하는 양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바로 서는 나주사회, 정이 넘치는 나주사회, 기업하는 사람은 기업하기 좋고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기 좋으며 자녀를 두신 부모님에게는 교육하기 좋은 나주를 만드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거창하게 정치가 어떻느니 생활정치가 무어니 하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나주를 위해 최선의 대책이 될 것인가 항상 고민하고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며 서로 상생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올바른 의정상을 보여드려 시민여러분이 주시는 의정활동비가 아깝지 않게 해 드릴 자신이 있으며 그러한 적임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에 출사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전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의 가족과 이웃을 사랑했기에 과감히 총을 들고 불의와 싸웠던 그런 마음으로 나주지역사회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것입니다.
      / 인터뷰·정리 조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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