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면 안성리마을 입구서 종친회 등 100여명 참가

▲의령 여씨 시조공연원비 및 입향조정착비제막식 후 기념사진
의령 여씨 시조공연원비 및 입향조정착비제막식이 8월 6일 동복면 안성리 마을 입구에서 성대하게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의령 여씨 화순종친회를 비롯해 서울, 부산, 대구경북, 문경, 하동, 순천종친회 등 100여명의 종친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제막행사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 액국가 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고인이 된 종친들에 대한 묵념, 내외빈 소개 및 개막식준비과정 경과보고에 이어 제막식, 비문낭독, 고유제와 축문낭독, 폐회식 식순으로 거행됐다.

여상규 의령 여씨 대종회장이자 국회의원은 축사에서 "여러 어려움속에서도 시조공 연원비 및 입향조정착비를 건립한 화순종친회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며,전국의 모든 의령여씨 종원들과 함께 축하 드린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이어 "종친회가 전통적인 친목 성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고 밑거름이 되어 상생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갈뿐만아니라 지역 종친회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수적인만큼 더욱 각별한 관심과 성원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행사준비를 위해 애써주신 많은 종친분들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가정에 항상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여(余)씨의 기원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扶餘)씨에 두고 있다.

중국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 백제복국군 편에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송서》〈백제전〉, 《일본서기》 등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왕후장상 1만2천여 명이 당장 소정방에게 피납되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여풍장은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하였다는 기록과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군거하는 당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 합류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의 후손 여선재가 고려 때 환국하였다고 전한다.

덧붙여 의령 여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여선재(余善才)라고 알려지고 있다. 여선재(余善才)는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그가 1103년(고려 숙종 8)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그를 의춘군(宜春君)에 봉하였다.

의춘은 의령(宜寧)의 옛 지명이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余英候)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한편, 국가통계에 따르면 의령 여씨 후손은 전국적으로 약 2만명 정도라고 알려지고 있다. 가구수는 5천여세대이나, 현재 주소지가 확인된 것은 약1,600여세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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