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갔다 오면 돈도 벌고 꿈에  그리던 여학교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돌아올 때는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들 ‘나도 가요, 나도 가요’ 하면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 셋이었습니다.”

지난 11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올해로 한일강제합병 100년을 맞이하면서 ‘14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이라는 제목으로 민주당 이용섭 의원과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일제피해자공제조합’ 공동주최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 나주 출신 양금덕 할머니의 증언이 눈시울을 뜨거워지게 했다.

1944년 5월 어느 봄날이었다.

당시 양 할머니는 나주대정국민학교(현 나주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일본으로)가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하니까. 반 전체가 다 손을 들었지요. 그러자 교장이 다시 담임선생한테 그 중에서 머리 좋고 신체 건강한 사람 10명만 고르라고 했죠.”

당시 ‘급장’이었던 양 할머니는 첫번째로 지목됐고, 양 할머니가 다녔던 나주 대정 국민학교에서만 이렇게 24명이 일본으로 향했다. 나주·목포·순천 등 전남에서 141명, 충남 138명이 함께했다. 모두 13~16살의 소녀들이었다. ‘군 위안부’문제에 가려 해방 60년이 되도록 그 존재조차 조명되지 않았던 ‘조선근로정신대’의 시작이었다.

양 할머니는 일본에 다녀오면 돈도 벌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는 말에 부모님까지 속여야만 했다. 혹여 부모가 알면 못 가게 할까 봐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야 가르쳐 줬다.

양금덕(81) 할머니는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다.

양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였다. “돈도 벌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던 일본땅,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노동과 배고픔이었다.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을 해야 했다.

“아침 7시에 밥 먹고 작업장으로 이동할 때는 네 줄로 맞춰서 갔죠. 서서 앞사람 뒤 꼭지만 보고 가야 했어요. 잠시 눈이라도 돌리면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발로 톡톡 찼지요. 그러다 보니 맨 날 그 길을 지나면서도 어디가 어디인 줄도 모른데다, 돈도 없이 도망갈 수도 없었죠.”

양 할머니에게 배정된 일은 시너나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내고,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줄칼로 다듬는 일이었다. 특히 시너의 강한 독성 냄새는 여간 고약한 게 아니었다.

 냄새 때문에 두통을 앓고 머리까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겨울이었지만 장갑조차 지급되지 않아 손 곳곳이 터지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 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기에, 부상에도 다시 작업대에 서야 했다. 그저 일하는 ‘기계’ 취급이었다.

배고픔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도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좋은 밥과 반찬을 배불리 먹은 반면, 조선인은 단무지하고 된장국이 전부였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다.

“한번은 식당에서 나오는데 일본인이 먹다 버린 쌀밥이 ‘바께스(양동이)’에 있는 거에요. 그 걸 보고 나오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워 먹을 생각이었는데, 일본 여성이 ‘기타나이 조센징(더러운 조선인)’이라며 내 손을 발로 뭉개는 바람에 그냥 나왔어요. 몰래 숨어서 그 여자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몰래 버려진 쌀밥을 수건에 싸서 구석에 가서 먹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맛있었던 밥은 없었던 것 같아요.”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였다.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 지진이 나고야 일대를 강타했다. 목포, 나주, 광주 출신 등 모두 6명의 소녀들이 건물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양 할머니도 건물더미에 깔렸고, 옆에 있던 동료 두 명이 죽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때 입은 상처는 지금도 선명했다.

양 할머니가, 아니 조선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이들이 겪은 설움은 어디 이것뿐이랴.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해방이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한 푼의 월급도 못받았지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그때는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양 할머니에겐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봉건적 관습이 심했던 시절,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해 오가던 혼담이 깨졌다.

혼담이 깨지기를 세 차례, 양 할머니는 스물 한살 때 건축 일을 하는 한 남자와 결혼했다. 근로정신대에 다녀온 사실을 숨기고자 급하게 치른 결혼식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살던 어느날, 술에 취한 남편이 다짜고짜 물었다. “일본에서 몇 명이나 상대했느냐”는 것이었다. 뒤늦게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군 위안부’ 취급을 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 뒤로 밖으로만 나돌았다. “6~7년 집에 안 들어오더니 마흔이 넘어서 어디서 머슴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왔어요. 병 걸려 일도 못하게 되자 같이 살던 여자가 도망간 거였어요. 산수오거리에 방 얻어 살다가 막내딸 낳고 두 살 때나 되서 곧 남편도 죽고 말았지요.”

남편은 그렇게 여섯 자식을 떠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여섯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다.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봇짐장수를 했다. 명절 때면 애들을 먹이려고 시골로 친척집으로 밥 얻으러, 떡 얻으러 다녀야 했다.

참 힘든 세월, 이제나저제나 일본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돌아가 있으면 월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방된 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용기를 냈다. 양 할머니는 지난 1999년 일본 정부와 나고야 미쓰비시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회의 냉담한 시선과 무관심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은 10년이 넘도록 이어졌지만, 철저히 ‘할머니들만의 재판’이었다. 정치권은 물론 자치단체, 언론, 시민단체 어느 누구도 할머니들의 법정 투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위안부’ 취급하는 사회의 냉담한 시선 탓에 일본에 재판 갈 때는 ‘며칠 서울 이모네 간다’ ‘계모임에서 강원도 놀러간다’고 속여야 했다.

“서운한 것은 정부예요. 나라가 힘없어 강제로 갔다 왔는데, 노인들이 일본과 재판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관심도 안 둬요. 지금까지 어떻게 사느냐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없고….”

할머니가 바라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다. 무작정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내가 일했던 것, 우리한테 안 줬던 임금 돌려달라는 것뿐인데…. 일당을 떼어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집에 가 기다리라고 해서 64년을 기다렸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우리 살아 있을 때 한이라도 풀어달라는 것이에요. 징한 세월 보냈는데, 위안부 누명이라도 벗으면 살겠어요.” 할머니의 눈에는 어느덧 참았던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어 힘이 난다. 10년의 기나긴 세월, 함께 해준 나고야의 양심적 시민들이고, 함께하려 나서준 광주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다.

“우리 이야기 알려주려고 영화(다큐멘터리)도 만들어주고,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요.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우리 이야기 알려주는 것만도 고마울 뿐이지요.” 일제에 청춘을 빼앗긴 할머니의 작은 바람, 그건 따뜻한 관심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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