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암태도 소작쟁의 對 잠자는 궁삼면 토지투쟁 ‘항일농민운동의 명암’

신안군 항일농민운동 유공자 발굴사업 쾌거…11명 독립유공자 서훈, 15명도 발표 앞둬

나주 궁삼면(宮三面) 농민들 ‘내 땅 찾기’ 80년 투쟁(1890~1970년) 허허벌판 속 방치  

 ▲역사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이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국도변에 세워진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탑’을 찾아 나주 농민들의 피어린 항쟁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역사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이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국도변에 세워진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탑’을 찾아 나주 농민들의 피어린 항쟁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1920년대 전국적인 소작쟁의의 도화선이 된 암태도 소작쟁의를 시작으로 지도, 도초도, 자은도, 매화도, 하의도에서 일제와 지주의 탄압에 맞서 항거했던 농민 11명이 광복 76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나머지 15명에 대해서는 오는 11월 순국선열의 날과 내년 3·1절에 발표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신안군(군수 박우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묻혀있던 섬사람들의 항일농민운동에 대한 재조명과 명예회복에 눈을 돌렸다.

2019년 목포대학교에 학술용역을 의뢰해 당시 농민운동 참여자 325명과 법원의 판결기록 등을 분석해 123명의 수감자를 확인했다. 

이어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2020년 7월 사단법인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오병균)를 출범시켰다. 

기념사업회는 당시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수감된 123명 중 26명의 후손을 찾아 당시 수감기록과 신문보도 내용 등 자료를 수집했으며, 연구용역을 맡았던 최성환 교수(목포대 사학과)의 자문을 받아 독립유공자 서훈신청서를 작성해 지난해 12월과 올해 4월에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던 것.

이처럼 신안군이 오랜 시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섬사람들의 항일농민운동사를 정립해나가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나주시의 항일농민운동사는 역사 속에 잠들어 있다.

1890년부터 1951년까지, 더 나아가 1970년 농지개혁이 완성될 때까지 무려 80년 동안 펼쳐졌던 나주 농민들의 피어린 역사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을 되돌아본다.

/ 편집자 주 

나주에 궁삼면이 있었다?

▲궁삼면 농민들의 투쟁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25.11.29.)
▲궁삼면 농민들의 투쟁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25.11.29.)

“국운이 기울면 오리(汚吏)가 발호하여 백성을 그 제물로 삼으니 이 고을 나주의 궁삼면 토지사건이 그 본보기였다”

나주시 왕곡면과 영암군 경계 국도13호선 도로변에 서 있는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의 첫머리다. 

탐욕에 눈이 먼 벼슬아치 한 명이 궁삼면의 수많은 농민에게 무려 80년 동안이나 토지분쟁에 휘말리게 했던 길고 험한 역사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궁삼면(宮三面)은 행정구역상의 명칭이 아니라 19세기 말 나주평야 일대의 3개 면, 지죽면(현 세지면), 욱곡면(현 왕곡면), 상곡면(현 이창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의 농경지 약 4만5천 두락이 하루아침에 엄귀비(嚴貴妃)의 경선궁(慶善宮) 소유지가 되어 버렸다. 

1888년부터 3년 동안 극심한 가뭄을 겪은 이 지역 농민 중에는 마을을 떠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인을 잃은 논이 무려 1,400여 두락이나 발생하였고, 집을 떠나지 못한 농민들도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실정이라 세금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전성창이라는 탐관오리가 이러한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으려다 여의치 않자 엄귀비의 친척인 김영규와 짜고 이 땅의 소유권을 경선궁으로 넘겨버린 것이다. 바로 1890년의 일이다. 

이로 인해 경선궁에 속한 3개 면이라는 의미로 궁삼면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이다. 어쨌든 궁삼면은 현재의 영산포와 왕곡·세지·봉황·다시면에 해당 된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전성창과 김영규

▲탐관오리 전성창과 김영규를 잊지 말자는 ‘오리비’와 이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탑 옆에 세워져 있다.
▲탐관오리 전성창과 김영규를 잊지 말자는 ‘오리비’와 이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탑 옆에 세워져 있다.

전성창(全聖暢)은 세금을 중앙정부에 납부하는 직책인 나주의 경저리(京邸吏)였다.

그는 연이은 가뭄으로 세금을 내기 어려운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악용하여 세금을 대납해주겠노라 선심을 쓰는 척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인을 잃은 농토를 자기 소유로 만들고, 대납기간 중의 담보물로 농민들의 토지 2만4천여 두락의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 280장을 챙겼다. 

이를 빌미로 그는 농민들의 토지까지 모두 자신의 소유로 강탈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농민들은 즉각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진정해서 토지를 되찾았다.

하지만 뒤이어 부임한 채규상에게 줄을 댄 전성창이 농민들의 땅을 다시 차지하였다. 
농민들도 호락호락하지 않고 다시 전성창과 재판을 벌인 끝에 토지를 환부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에 전성창은 김영규와 짜고 지난번에 받아둔 담보서류 280장을 10만 냥에 경선궁에 팔았다고 주장하였다. 

경선궁측은 소작료 검사관이란 이름으로 파견한 김영규에게 궁삼면 토지에 대한 소작료를 징수토록 하였다. 

이에 궁삼면 농민들은 “이 토지는 우리 선조 전래의 소유로서 누구에게도 매각한 일이 없다”며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김영규는 광주의 순검과 장졸 등 1백여 명을 인솔하고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농민들을 잡아 가두거나 두들겨 패며 소작료를 빼앗아 갔다. 

이에 맞서 궁삼면 농민들은 김영규의 권력 남용과 폭력행위를 경성재판소에 제소하기 위해 32명의 대표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김영규의 형인 궁내부 경무관 김영진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채 사유지를 입증하는 자료를 몰수하고 경선궁 궁장토임을 인정하라는 날인을 강요하였다.

궁삼면 농민들은 억울하지만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궁삼면 대부분의 농경지가 형식적으로는 경선궁 차지가 되고 만 것이다. 

탐관오리보다 더 악랄한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 선착정 모습(궁삼면 토지투쟁 현장)
▲영산포 선착정 모습(궁삼면 토지투쟁 현장)

1897년 목포항 개항 이후 영산포는 전남 내륙지방에 형성된 최초의 식민전초기지였다. 궁삼면에서 매수한 토지물량은 전남에서 수탈한 토지의 40%에 달했다. 

일제는 1908년 말 식민통치를 목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를 설립하였다. 동척의 주요 사업 목표는 토지의 매입과 일본인의 농업 이민을 장려하는 일이었다.

특히 비옥한 땅의 매수에 눈독을 들였는데, 최초의 대상지가 바로 궁삼면 토지였다.

동척은 경선궁의 재무 책임자 엄주익과의 협상에서 궁삼면 농민과의 소송으로 인한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말하며 토지를 팔라고 종용하였다. 

경선궁 역시 이처럼 속내가 복잡한 토지를 처리하기 위해 중개인에게 토지관계 서류를 인도하였다.

중개인은 서류를 조작하여 시가 200만원 상당의 토지를 단돈 8만원에 동척에 팔았다.

동척이 이때 사들인 토지중에는 일반 사유지 150여 두락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동척은 궁삼면 농민들에게 매매계약의 승인과 소작계약을 강요했다.

이들이 모두 거부하자 경찰을 동원하여 각 면 대표인 염자옥, 이상협 등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90대의 태형과 고문을 가했다.

경찰을 앞세운 동척의 위협에 못 이겨 각 면 대표들은 토지매매 계약서에 날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유권은 동척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동척은 ‘동척소유’라는 푯말을 궁삼면 곳곳에 세우고, 우선적으로 일본인 이민 14호를 궁삼면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궁삼면 농민들이 격렬히 항의하자, 출동한 경찰들이 농민들을 목검으로 후려치고 발로 짓이기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내용
▲당시 동아일보 기사내용

심지어 왕곡면에 거주하는 이회춘의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회춘의 모친은 당시 자신의 논에 푯말을 세우는 동척 직원들에게 “이 논은 우리 것인데 왜 푯말을 세우느냐”고 말하며 푯말을 뽑아버렸다. 이에 나카시마(中島)란 헌병이 구둣발로 어머니의 가슴을 마구 차고 목도를 휘둘러 죽음에 이른 것이다. 

나라는 잃어도 농토는 못 내놓아
   
나라가 망한 1910년대에도 궁삼면 농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본격적인 소송에 돌입하였다.

1912년 서화현 외 1천493명은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양성진 외 16명은 토지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양성진 등은 최종심인 고등법원에서 소유권을 인정받았지만 동척은 경찰의 위력을 빌어 토지를 강제로 점거한 채 반환하지 않았다. 

일제 재판부는 서화현 등 약 1천500명이 관련된 토지회수 소송에서는 동척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척은 곧바로 직원 50여 명을 동원하여 소작료의 강제 징수에 나섰으나,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였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내용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내용

나아가 소유권확인 및 증명말소 소송을 다시 재기하여 멀고도 불리한 싸움을 이어갔다. 

이들은 이 땅에 대한 조선 정부와 대한제국,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법적 조처를 하나씩 열거하며 탐관오리와 동척의 잘못, 모순적인 판결 등을 제시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동척이 불리해지자 헌병과 동척 직원을 동원하여 주모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궁삼면 농민 2만명을 자택에 감금시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는 등 비인권적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소작료를 강요하면서 불응하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결국 수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나정문은 장기 파열로 사망하였다. 두 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삼일운동, 궁삼면 농민들의 줄기찬 투쟁의 원동력

삼일운동은 궁삼면 농민들에게도 크나큰 용기와 민족의식을 되살리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10년대 중반 재판에 패소하여 실의에 빠졌던 궁삼면 농민들은 1919년 3월 15일 나주읍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3월말부터 궁삼면에 해당하는 영산포와 세지·왕곡면에서 횃불시위를 일으켰다.

궁삼면 농민들의 활동 재개는 1923년 6월의 <동아일보>에 나타난다. 30여 년간 토지를 회수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향후 계획이 장문의 기사로 실려 있다. 

즉 궁삼면 4만5천 두락의 토지소유권은 1천400여 농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서 전성창의 온갖 농간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과정, 그리고 동척 및 일제 헌병의 위협과 탄압으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조차 없는 처지 등을 소개한 것이다. 

이들에 대해 “양순한 농민은 억울하고 분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나 좀 똑똑한 사람은 대부분 동척에 매수되어 사복을 채웠다”고 폭로했다. 

그러던 1922년 8월 농민 대표를 중추원에 보내어 억울함을 호소하려다 또 구금되었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나재기 등이 동척을 상대로 토지회수운동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농민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진화’

1924년 말 궁삼면 농민의 대표자 이화춘, 나재기 등 4명은 일본 도쿄에 건너가 척식국(拓殖局) 등 관계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925년 1월 말 궁삼면 농민 6, 7천명이 왕곡면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주군수와 일촉즉발의 험악한 상황까지 치달았다.

군수가 피신하려 하자 분개한 3천여 명의 여성들이 군수를 못가게 하자 결국 군수가 백배사죄하며 용서를 구함으로써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같은 해 6월말 궁삼면 대표 박규양은 일본 관계자들과 협력하여 총독부 및 동척과 협의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면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때 경찰은 불상사를 막는다는 미명하게 3면 13동 50명의 대표자만을 참석시켜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하였다. 

이어 나주의 노농공영회에서도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박공근 등 3인을 조사위원으로 선정하고 3대 결의사항을 발표하였다.

즉 토지회수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사상단체인 효종단(曉鍾團) 및 나주청년회와 연합하여 토지회수대책을 강구할 것이며, 전남해방자동맹에 후원을 요청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로써 궁삼면 농민들의 토지회수투쟁은 지역사회단체와 연대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가게 되었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의 분수령

1925년 10월, 궁삼면 농민들은 영산포역을 비롯한 나주역과 송정리역에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는 면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나주의 사회운동을 이끄는 이항발에게도 대책을 요청하였다. 

또한 토지회수를 위해 나주청년회와 더불어 농민조합을 결성한 후 위원장에 이화춘, 위원은 나재기 등 7인을 선출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농민대회를 창립하여 이화춘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이들을 돕기 위해 경성노동회 간부 이광, 전남해방자동맹 강석봉 등이 달려왔다. 

이에 고무된 궁삼면 농민들은 동척의 구입가인 약 8만원에 되사자는 의견을 취소하고 무상회수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농민회와 토지회수운동부를 결성하였다. 

동척의 완강한 반대로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11월에 이르러 궁삼면 농민 1천5백여 명은 동척에 빼앗긴 토지를 회수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총독부 그리고 도청에 혈장(血章), 즉 자신의 피로 지장을 찍어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일본 정부에 탄원하기 위해 파송위원을 선출하여 일본에 파견하였고, 소작료불납동맹으로 맞섰다. 

한편, 10여년 동안 강제로 거두어 간 소작료 13만6천석의 대금 207만6천원을 반환해달라고 동척에 청구하였다.

영산면 오량리 농민 약 50명은 각자의 피로서 이른바 혈맹을 맺고 토지회수를 위해 최후까지 싸울 것을 천명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데도 동척은 끊임없이 소작료 납부를 강요하며 농민들을 괴롭혔다.

이에 궁삼면 농민 7천명은 장구와 나팔을 불며 그들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동척의 요청에 의해 경찰 50여 명이 즉각 출동하여 이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과정에서 큰 충돌이 발생하였다.

분노한 농민 약 1만명을 수십명 경관으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농민들은 물론 출동한 경찰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하였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 과정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 과정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들

그래서인지 나주 일대에는 수천명의 일본군이 파견된다는 뜬소문이 나돌았다. 

12월에 이르러 다시 일본 정부에 진정과 탄원을 하기 위해 농민대표 박승효 등 10명이 출발하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척식국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를 방문하였다. 

후세 변호사는 궁삼면 농민들이 작성한 혈서와 혈장을 보고 감동받아 적극 돕기로 확약하였다.

그 후 후세 변호사의 나주 방문과 기자회견 등으로 일본 내에서도 궁삼면 농민들을 동정하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일제의 유화정책에도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

1926년에 이르러 면민 대표 26인은 동척 대표 및 총독부 관리와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동척은 농민들의 묘지와 택지 등 105정보를 무상으로 양여하고, 경작지 750정보는 시가의 20% 가격으로 10년 동안 상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농민들은 855정보를 되찾았으나, 이는 실제 빼앗긴 토지의 1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궁삼면 농민들은 상환가 총 45만원 원금과 그 이자의 체납으로 빚쟁이로 전락하였다.

1930년 여름, 이들은 최관진 등 진정위원을 선출하여 총독부와 전남도청에 2회에 걸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925년 이전의 체납된 소작료를 벼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해줄 것과 상환금의 기간 연장 및 이자를 낮춰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1930년대에 만주를 침략한 뒤 전시동원 식민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다.

미군정 신한공사로 넘어간 땅, 우여곡절 끝에 농민 품으로

해방되자 궁삼면 농민들은 내 땅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농민회를 재건하였다.

이들은 그동안 일제와 줄기차게 투쟁해온 나재기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여 무상분배의 구호를 내걸었다. 

이들이 동척 영산포출장소를 접수하여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중 미군정의 신한공사가 동척이 관리하던 땅을 차지하였다.

궁삼면 농민들의 토지 역시 동척에서 다시 미군정의 신한공사로 넘어간 것이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궁삼면 농민 대표들은 국회를 찾아가 해결방안을 호소하였다. 

1949년 7월 나재기 등 면민 약 2천500명의 연서로 ‘궁삼면 토지반환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해결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2월 국회는 나주 출신 국회의원 이항발, 김상호의 적극적인 지원과 현지답사를 한 국회의원들의 조사보고를 토대로 정부에 무상반환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당시 영산포 선창의 모습
▲당시 영산포 선창의 모습

그러나 4개월 뒤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 건의안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결국 궁삼면 토지는 1951년 농지개혁법이 시행된 이후 무상반환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60여 년의 끈질긴 항쟁의 끝에 농민들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1970년 다른 귀속농지와 같은 조건으로 이들에게 분배되었다.

궁삼면 농민들의 피어린 토지회수투쟁을 대한민국 정부조차 ‘법적인 해결’로 마무리한 것이다. 

농민운동사의 금자탑, 지금은 허허벌판에 홀로 

농민들이 내 땅을 되찾기 위해 80년 동안 줄기차게 투쟁한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대한민국 농민운동사의 찬란한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91년 나주 지역민들은 옛 궁삼면 너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길목에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 옆에는 궁삼면 농민들을 질곡에 빠뜨린 주범이자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전성창과 김영규를 잊지 말자는 ‘오리비’도 함께 서 있다.

결국 농민들이 제 땅을 다시 돈을 내고 사는 큰 부담을 겪은 뒤에야 이 투쟁은 끝이 난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바로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이다. 

그런데 지금 나주에서는 그들의 투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10년 전 학생들과 함께 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를 찾은 전남역사교사모임 박태선 교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뼈아픈 현실이었던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이 정식으로 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밝히며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고 올바를 역사관을 정립하도록 하는 노력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2021년 현재 나주시의 역사시계는 꽁꽁 얼어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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