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나주 문화원 역사문화 답사

▲임준선(나주시 남평읍)
▲임준선(나주시 남평읍)

나주문화원(최기복)에서 준비한 2022년 상반기 역사문화 답사에 다녀왔다.

5월의 푸른 하늘이 더 없이 좋았고, 또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답사를 다녀와서 내심 즐거웠다.

나주 문화원은 이제 점점 기지개를 켜면서 문화 사업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바로 최기복 나주문화원장이 있다.

또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문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선출되면서 지역 문화 정책들도 달라지고 있다.

바야흐로 변화의 시대에 걸 맞는 문화 나주의 시대 건설의 첫걸음들이 시작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나주시민들의 의식이다.

천년 목사골 나주의 문화 정책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의견을 내야 한다.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천년 목사골 나주의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첫 번째 답사지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었다.

우리의 답사 이전 인 511일에 이미 전남도, 장흥군,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제128주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은 황토현 전적 전투의 전승일로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장흥군은 이날 석대들을 내달린 아름다운 꽃, 이소사특별공연 등을 선보였다. ‘석대들은 장흥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지이고 이소사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동학혁명의 여성 선봉장이다.

이 외에도 장흥군은 역사 인물과 전적지를 음악, 연극, 소설 등의 장르와 생태 문화 콘텐츠로 승화시켜나가는 일 들을 하고 있다.

장흥읍 석대들에서 동학 혁명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 전투로 많은 사망자가 나왔으며 석대들전투는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된 곳이다.

우리 나주야말로 천년 목사골로 인물의 고장이다. 얼마든지 발굴한 역사 인물들이 많은 고장이다.

유홍준 교수가 남도 답사 1번지로 인정한 강진에서는 강진 영랑생가를 먼저 방문했다.

강진에서 문화해설은 고순덕 전라남도 문화해설사가 진행 해주었는데 쉽고 흥미롭게 문화해설을 해주어서 고마웠다.

답사 중간에 자기도 나주 출신이라고 해서 반가웠다.

김영란 시인의 대표 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모란이 피기가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잘길 테요

마침 모란이 떨어져 시들어버린 시기라 더욱 이 시인의 시와 감상이 딱 맞아들어갔다.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겼다.

사의재는 우리가 오후에 갈 다산초당과 이야기가 연관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머물던 주막집이다.

사의재 (四宜齋)’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 ‘과목한 말씨’ · ‘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했던 곳이다.

남도의 인심과 배려로 마련된 곳이다.

정약용은 또 강진 사람들의 배려로 1808년에 윤규로의 산정이던 다산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했다.

그때 <목민심서> 저술 등 실학의 대표적인 실학 저술의 집대성이 있었고, 많은 제자들과 교유하면서 강진이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의 본 고장이 되게했다.

특히 정약용은 이 곳을 다산(茶山)이라고 하고 자기 호로 삼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기는 남도 답사 1번지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차를 배우고 실학 정신을 건네준 대상은 천년고찰 백련사의 혜장이었다.

백련사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211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특히 이때 서민 불교 운동이 한창이던 1232년에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했다.

다산의 애민정신과 백련사의 서민 불료 정신의 맥이 이런 역사에서 이어진다.

백운동원림에서 강진 월출산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선경(仙境)이로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만든 원림이다.

이 별서에도 다산의 흔적이 있다.

다산 선생이 1812년 이 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 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는데 이를 근거로 호남의 유서 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이 되었다.

초의선사는 혜장선사의 스승격인 스님으로, 다산과 시서화의 예술에서 특별한 흔적을 남겨놓은 차의 중흥조이다.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과의 교유를 계속해왔다.

초의는 정약용에게 다선()의 진미를 더해 주었으며 다산은 <동다기(東茶記)>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東爹頌)>을 지어 '다도'를 통한 깊이 있는 교유를 하였다.

해남과 강진이 남도 차 문화의 산실이 된 것도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초의는 30세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추사 김정희를 만나 교유하고 홍현주 · 신위 · 김명희 · 정학연 · 정학유 · 신관호 · 권돈인 들을 비롯한 당대의 실학자, 문인, 사상가들과 널리 교분을 맺었다. 

남도를 기반으로 한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과 문예 르네상스는 위에서와 같이 문화 인물들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코로나 이후 우리 나주의 역사문화 중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만남 역사와 역사의 만남, 문화의 만남, 지역과 지역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 힘과 지혜가 나주를 정말 문화 역사의 도시 나주로 만들어갈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들의 만남이다.

우리 나주의 시민들과의 차별 없는 만남, 대립된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대화와 타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우리 나주의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새로운 지방단체장들은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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